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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11-16 11:22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7,672   추천 : 0  

김인덕 수필집에서  김인덕 延教书店

 

 

지천명의 나이에 이르러서야 인생에는 정답이 없으며 수학처럼 절대불변의 해답 또한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단하게 되였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에게 인생의 거울이 될 만한 속담들도 온통 모순투성이이다. “우물을 파도 한 우물을 파라.”와 “길이 아니거든 가지 말라.”는 속담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대체 어느 속담을 믿고 어느 속담을 믿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 아닐 수 없다.

 

하다면 인생에는 삶의 기술 같은 것은 없을가. 살다 보니 인간관계, 직장생활, 사랑, 가정은 물론 한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까지 통털어 우리의 삶은 다가서기와 물러서기의 줄다리기가 아닌가 싶다. 한 우물을 파든 길이 아니거든 가지 말든 다가서기와 물러서기를 적중하게 선택하는 것이 성공의 관문이라고 생각될 때가 한두번이 아니다.

 

옛날 한 왕은 장님들을 뜰에 불러내여 큰 코끼리를 만져보게 하였다. 장인들은 코끼리 근처에 모여서 제각기 더듬더듬 코끼리를 만졌다. 어떤 사람은 배를, 어떤 사람은 귀를, 어떤 사람은 다리를, 어떤 사람은 코를 만졌다. 얼마 후 왕이 장님들에게 물었다. “너희들은 코끼리를 만졌는데 어떤 것이였느냐?” 그러자 배를 만진 장님은 넓은 벽과 같다고 하고 귀를 만진 장님은 큰 부채 같다고 하고 다리를 만진 장님은 굵은 기둥을 닮았다고 하였다. 제일 마지막에 코를 만진 장님이 앞으로 썩 나와서 “대왕이시여! 모두 틀렸습니다. 코끼리는 굵은 바줄과 같습니다.”고 우렁차게 아뢰였다. 이 대답을 들은 왕은 껄껄 웃으면서 신하들에게 “장님들 뿐만 아니라 세상사람들은 모두 진리를 모르고 제 생각만 옳다고 주장한다. 장님을 보고 웃을 일이 아니다.”라고 말했다.

 

다가설 줄만 알고 물러설 줄을 모른다면 한마리의 코끼리가 두개의 원한을 유발할 수도 있다. 한발작 다가서서 직접 만져보고 체험하는 것도 좋겠지만 한발작 물러서서 사고하는 것도 자못 중요하다. 나무만 보고 숲을 보지 못한다면 소탐대실(小贪大失)이 되기 십상이고 숲만 보고 나무를 모른다면 청사진은 그럴듯한데 곰이 옥수수 따는 식으로 별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게 된다.

 

인간관계도 마찬가지이다. 아이로니하게도 인간관계를 잘해보려고 상대에게 다가서며 안깐힘을 쓰는 사람들이 오히려 인간관계가 실패하는 경우가 많다. 이런 사람들은 자기 스타일이 상대에게 렬등하게 보일가 봐 개성을 죽이기도 하고 자기의 단점을 감추기도 하는데 오히려 진정성을 상실하게 된다. 인간은 사람마다 시각차이가 존재한다. 나의 단점이 대방에겐 장점으로 보일 수도 있고 나의 장점이 대방에게는 단점으로 보일 수가 있다. 인간은 서로 착각하면서 바라보기 때문에 상대방에게 잘 보일 필요도 없거니와 자신을 감출 필요도 없다.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거리는 필수적이다. 인간은 누구나 나름대로의 개성을 지니고 산다. 개성은 그만의 부호임과 동시에 부지불식간에 대방에게 상처를 주는 ‘투창’이 될 수도 있다. 한걸음 물러선다는 것은 자타의 개성을 보존하는 방책이기도 하거니와 자타를 배려하는 매너이기도 하다.

 

한창 뜨거운 사랑에 빠진 련인관계라고 다르겠는가? 고슴도치들은 한겨울이 되면 서로의 체온으로 추위를 견디기 위해 가까이 다가가는데 가까이 가면 상대의 가시에 찔려 상처를 입게 되므로 다가서기와 물러서기를 수없이 반복하며 서로의 체온을 느끼면서도 상처를 주지 않는 적당한 거리를 찾는다고 한다. 사랑으로 다가가는 방법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가장 확실한 방법과 가장 중요한 것은 마음으로 다가가는 것이라 하겠다. 사랑을 할 때 머리로 계산하고 마음이 시키는 대로 하지 않는다면 사랑의 온도는 비등할 수 없다. 누군가 세상에서 가장 먼 거리는 사람의 머리와 가슴까지의 30센치메터 밖에 안되는 거리이고 머리에서 가슴으로 이동하는 데 평생이 걸린다고 하였다. 하지만 아무리 열병을 앓는 사랑이라 할지라도 한걸음 물러서는 지혜도 필요하다. 련애의 도가니에서 허우적거리다 보면 바보가 되기 십상이다. 사랑과 결혼은 서로 다른 두개의 얼굴이다. 사랑은 곱게 화장한 얼굴이라면 결혼은 아침에 깨여났을 때 처음 대하는 민낯이다. 사랑은 가슴으로 한다면 결혼은 머리로 한다. 뜨겁던 가슴의 온도가 내려가고 신비한 베일이 벗겨지면 대방의 흠결이 보이기 시작하면서 티격태격하다가 결국 혼인생활에 종지부를 찍는 경우도 많다. 다가서다 물러서는 갈대처럼 유연한 만남이 련애의 기술이 아닌가 싶다.

 

사물이 존재하는 세상리치도 마찬가지이다. 머리와 머리를 맞대고 자라는 떡갈나무들은 절대 재목으로 자라지 못한다. 서로 제한된 양분과 해빛을 탐하기 위해 아웅다웅하다 보면 모두가 영양부족으로 기를 펴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락을 이룬 락락장송들은 사뭇 다른 모습이다. 그들에겐 서로가 서로를 바라볼 수 있는 여유가 있고 적정거리가 있다. 그들은 자양분을 섭취하기 위해 마음대로 뿌리를 뻗칠 수 있고 해빛을 얻기 위해 자유롭게 잎사귀를 펼치되 렴치없이 남의 령지까지는 탐하지 않는다. 또 아픔을 감내하면서도 자기의 몸의 가지를 아래로부터 차례로 탈락시키는데 이는 락락장송으로 자라기 위한 성장통이라 하겠다. 또한 나무는 혼자 멀리 떨어져도 재목으로 자라기 힘들다. 저만치 외롭게 바위에 뿌리를 내린 소나무들을 보라. 그런 소나무들은 운치가 있어보일지는 모르지만 대체로 매끈하지 못하다. 바람막이가 없어 풍우에 뒤틀리고 세파에 찌들었기 때문이다.

 

사업을 대함에 있어서도 적정거리의 미학이 유효하다. 32살 난 우연은 복단대학의 우수한 청년교원이고 아이 하나를 둔 엄마이기도 하다. 그는 2009년 12월에 유선암으로 확진받고 2011년 4월에 사망했다. 그는 투병 기간중 “사는 것이 곧 왕도이다.”라는 일기를 썼는데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려주었고 인생이란 도대체 무엇인가 하는 영원한 숙제를 다시 심사숙고하게 했다. 그는 일기에서 “나는 30년간 일벌레로 살아왔다. 나에겐 유전병도 없고 체질도 좋았고 아이를 출산하고 나서 모유를 먹였다. 이 세상을 떠날 림박이 되여서야 어떠한 연장근무도, 자기에게 너무 큰 압력을 주는 것도 모두 만성자살과 같다는 것을 알게 되였다. 큰집과 좋은 차는 모두 뜬 구름과 같은 것이다. 더 많은 시간을 내여 아이와 함께 보내지 못한 것이 한스럽다. 필사적으로 큰집을 바꾸려 하지 말라.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라면 달팽이집도 행복하다.”

 

인생의 여러단계에서 다가서기와 물러서기의 력학관계가 모름지기 변하는 것이 리치인 것 같다. 젊은 시절에는 고슴도치처럼 상처를 입을지라도 적정거리를 모색하기 위해 다가서기를 무수히 반복할 것이고 정체성에 확신을 갖는 중년에는 다가서기와 물러서기의 경계를 자유자재로 넘나들 것이며 로년에는 한발 썩 물러서서 여운을 주는 한폭의 수묵화가 될 것이다.

 

우리는 신산한 인생을 살아가면서 공존의 거리를 찾지 못해 평생 타올거리며 만신창이가 된다. 가시투성이의 몸에서 예쁘고 귀여운 꽃이 피여날리 만무하다. 오세영시인은 〈양귀비꽃〉이란 주옥같은 시를 썼다.

“다가서면 관능이고 / 물러서면 슬픔이다 / 아름다움은 적당한 거리에서만 있는 것 / 너무 가까워도 너무 멀어도 / 안된다 / 다가서면 눈 멀고 / 물러서면 어두운 사랑처럼 활활 / 타오르는 꽃 / 아름다움은 / 관능과 슬픔이 태워 올리는 / 빛이다”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 즐거움과 고통의 요소가 점철된 것이 바로 양귀비꽃이다. 양귀비를 바라보는 오세영시인의 시각에서 다가서기와 물러서기의 인생의 철리를 한층 더 깊이 깨도하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