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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20-04-05 10:47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8,518   추천 : 1  

                                                                                 2020.4.5

 

오늘은 청명이다.

나는 이른아침 창문을 열어제꼈다. 어제저녁 고인들에게 종이돈을 태운 길가의 수많은 불무지들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돌아가신 부모님과 작년에 뜻밖에 세상을 떠난 동생생각에 잠겨 침실에 들어와 사진첩을 꺼내들었다. 한장한장의 사진속에는 우리 가족들이 남겨놓은 흘러간 그 시절, 그 세월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나는 1959년 할빈시의 승덕가에서 태여났다. 부모들은 서란현 수곡류에서 살다가 할빈으로 이사를 갔다고 하였다. 고모네집과 이웃에 살았는데 고모부 리진갑은 유압기를 만드는 작은 공장을 차리여 잘살았다. 아버지는 공장에 다녔다. 송화강에서 나를 안고 찍은 어머니의 사진을 보니 저도 모르게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내가 두 살때 아버지는 중국정부의 호소에 향응하여 조선에 나가려고 하였다. 고모와 아성에서 살고있는 외할머니가 친척들을 버리고 어디에 가는가고 하면서 가지말라고 눈물흘리며 애원하였지만 아버지의 결심을 꺾을수 없었다.

외할머니는 해방전에 외할아버지와 헤여져 생사여부를 모르며 홀로 외동딸인 어머니를  고생스레 키웠는데  타국에 떠난다하니 그 마음 오죽하랴. 할아버지와 할머니, 친척들이 만류하였지만 소용이 없었다. 

우리는 조선으로 가는 사람들과 함께 렬차에 올라 시민들의 환영을 받으며 출발하였다. 우리는 산이 많은 조선의 강계시 석현동에 안치되였다. 아버지는 강계수의대학에 다니고 어머니는 도로관리원이 되였으며 나는 유치원에 다녔다. 

나는 빨래하는 어머니를 따라 맑은 강가에서 고기잡이하면서 놀던 일이며 아버지와 인풍루에서 청량음료수를 마시며 독로강을 부감하던 기억이 아직도 눈앞에 생생하다. 그때 강계에서 동생이 태여났다.

내가 일곱살때 어머니가 간염으로 생명이 위급하였다. 외할머니가 너무 그리워 어머니는 아버지와 의논하였다. 아버지도 부모형제들이 보고 싶어 중국으로 가기로 결심하고 중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심양에는 나의 할아버지, 할머니와 큰집, 고모집이 있었다. 혈육들은 서로 만나   너무도 기뻐 부둥켜안고 울면서 자기 자식들을 소개해주었다.

할아버지와 할머니가 사는 큰집은 일곱식구였다. 우리는 집이없어 림시 큰집에서 함께 살기로 하였다.

나의 부모님들은 가마니와 새끼를 꼬면서 일하다가 이듬해 친척들의 도움으로 초가집을 짓고 분가하였다. 그때는 잘사는 집이 별로 없었지만 우리는 조선에서 빈손으로 왔기에 생활이 몹시 가난하였다. 김장배추를 살 돈이 없어 남의 집에서 버린 배추잎을 주어 백김치를 담구었다. 나는 아홉살 때 방학에 혼자 할빈에 갔다. 고모부는 공장의 합영일로 감옥살이를(후에 명예 회복) 하고 고모도 자식 셋을 키우기에 힘들었다. 아성의 외할머니집에서 방학을 보내고 외할머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쌀을 지고온 외할머니는 어머니를 만나 너무도 기뻐 붙잡고 통곡하였다.

나는 사진첩을 계속 번져 보았다.

부모가 명렴공사 산하 생산조에 분배받고 찍은 부모들의 사진에서 항상 공작복을 입고 아무리 가난해도 웃음으로 흘러보내며 고통스러워도 내색을 하지않고 병아리도 키우고, 마당에 꽃도 심고, 자식들에게 옛말도 들려주면서 정직한 사람이 되여야 한다고 가르쳐주면서 월급이 적어 구차하게 사는 가정의 형편을 헤아려 앓는 몸이지만 약을 사 드실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쌀밥이 있으면 먼저 자식들에게 챙겨주며 자신은 강낭이 떡을 드시면서도 미소를 지으며 고소하다고 말씀하시던 선량한 어머니와 자식들을 먹여살리려고 아글타글 열심히 일하시던 름름한 아버지의 생각에 잠기였다.   그때 해외공민들의 학습조가 꾸려지면서 학습을 자주 우리 집에서 하였다. 어머니는 언제나 학습모임에 참가한 공민들을 따뜻이 대해주었다. 그때는 우리 집에 조선 출판물들이 많이 왔는데 나는 정열적인 독자였다. 심양에 조선영화필림이 올때마다 영화표를 얻으려고 우리 집에 찾아오는 사람들을 볼때마다 나는 해외공민의 자랑을 느끼였고 온 집안 식구들이 손님들과 함께 영화를 볼때가 마치 명절분위기와 다름이 없었다. 그때 아무리 가난해도 부모가 계시여 나는 행복과 사랑을 느꼈고 조국이 있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하였다.

어머니의 병이 점차 심하여 동릉에 있는 전염병원에 입원한적이 있었다. 돈이 없어 의사의 권고에도 먼저 퇴원하였다. 퇴원하면서 온 집시구가 다 울었다. 그후 공장에 다니지 못하고 앓다가 간경화병으로 어린 우리를 남겨두고  38세의 젊은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의과대학병원에서 사망하였는데 치료비를 물지못해 화장을 못하였다. 후에 심양주재조선령사관의 도움을 받아서야 시신을 화장할수 있었다.    

가난한 집에 어머니까지 세상을 떠났으니 초상난것같다. 밥을 짓는데 석탄이 잘 붙지를 않아 고생하였다. 음식할줄을 몰라 국건더기에 간장을 쳐서 반찬으로 먹었는데 남들이 볼가봐 늘 걱정하였다. 겨울이면 집이 추워 방학에는 대성역에 석탄을 주으려 자주다녔다. 중학교시절 학습성적이 소학교시절 보다 내려갔다. 아버지가 혼자서 아이 셋을 공부기키느라고 얼마나 고생하셨겠는가고 지금 생각하니 무섭고 끔찍하다.

 내가 76년도에 심양시 조선족제1중학교를 졸업하였다.

  조선공민이여서 하향은 하지않고 도시에 남았다. 쇠줄그물을 생산하는 금속그물공장에 분배받았다. 전공을 배우다가 반년후에 외국인이 감전되면 안된다며 그물짜는 공인이 되였다. 그물짜는 일은 힘들지는 않았지만 쉴새가 없었다.

개혁개방후 시장경제를 실시하면서 개체호들이 속출하였다. 도시개발로 공장이 영반쪽으로 이사하여 거리가 멀어져 나는 출근할때 자전거를 타고 90분쯤 가야하였다. 겨울에는 해가 짧아 미끄러운 길에서 넘어지기가 일쑤였지만 부지런히 출근하였다.

몇년이 지난후 동생들이 졸업하고 생활이 좀 펴졌다. 우리는 오두막 같은 낡은 초가집을 허물고 새집을 지었는데 비용을 갚지 못하여 식당을 꾸렸다. 온 집식구가 식당일을 하였는데 나도 짬짬히 도왔다. 2년나마 부지런히 벌어 빚도 갚고 마당에 삼간집을 지었다. 하지만 식당도 경쟁이 심하고 힘들어 문을 닫고 계속 출근하였다. 직업을 구하지 못한 녀동생은 짠지를 팔았다.

 나는 심양시 대표로 90년도에 4.15방문단으로 조국에서 한달동안 잊지못할 나날을 보내였다. 27년만에 조국에 갔는데 어버이수령님과 함께 공연도 관람하였고 평양을 비롯하여 개성, 남포, 금강산, 묘향산, 청진에서 먼 친척도 만나보았다. 해외에서 한일도 없는 나는 그후부터 고마운 조국을 더 사랑하게 되였다.

안해는 부지런하고 알뜰하였는데  맏며느리로 시집와 마음 고생도 많았다.  몇년후 동생도 결혼하여 우리 형제는 제살림을 하면서 한마당에서 사이좋게 살았다. 도시개발로 우리는 층집에서 생활하게 되였다. 가스와 전기로 음식을 하니 부엌에서 해방된 기분이였다.

하지만 나의 생활에는 저도 모르게 재난이 닥쳐왔다. 도급제를 실시하면서 20년간 줄곧 한 공장에서 청춘을 고스란히 바치며 일하던 내가 실업을 당하였다. 공장에서 부지런히 일하여 선진모범생산자로도 선출되였던 내가 이제는 정든 공장을 떠나야 하였다. 시장경제가 사정없이 나의 밥통을 부셔놓았던것이다.

기술도 재간도 없고 직업구할 용기도 없어 기가 푹 죽고 절망에 빠져 자살할 생각까지 하면서 두문불출하였다. 밥만 먹고 살겠다는 소박한 요구조차 시장경제는 들어주지않는다. 나는 그때에야 직업이 이렇게 귀중한지를 뼈저리게 느꼈고 그때에야 내가 이렇게 무능한지를 알았다. 자식을 먹여 살릴수 없는 내가 너무나 한심하였다. 두달동안 실면하여 체중이 열근이나 줄었다. 나는 할수없어 아는 사람이 없는 심양역의 화물역에서 짐을 싣고 부리는 막로동을 하였다.  그런 일도 경쟁이 심해 일감이 적었다. 몸이 허약해 일이 힘에 부치였다. 그나마 없으면 한푼도 벌지못해 안해보기 부끄러웠다.

한달 일하고보니 번돈이 그전 월급의 절반도 못되였다. 그래도 안해는 이제는 먹고 살수 있다고 웃으며 나를 칭찬하였다. 그때 속이 울컥하여 눈물이 고였지만 고마운 안해를 행복하게 하여주겠다고 나는 몰래 맹세하였다. 반년 넘어 막로동 일을 하다가 광천수를 나르는 일을 하는데 하루는 사촌동생이 광동의 심전에서 가이드를 하면 돈 벌기가 괞찬다고 하여 심양에 있기 싫던차라 잘됐다고 생각하고 함께 갔다.

심전에도 상황이 좋지않았다. 두달간 일거리를 찾으며 헤매다가 사촌동생은 곤명으로 떠나갔다.  직업을 구하려 한 공장에 갔더니 마흔살이 넘었다고 한마디로 거절하였다. 심전에서 짠지파는 장사를 할 생각으로 한 시장의 매대를 임대맡았다. 그런데 광동사람들은 채소도 날걸로 먹지않고 매운것도 싫어하여 팔리지않았다. 날이 더워 음식들이 반나절이면 쉬는데 랭동시설이 없어서 그만두었다. 하여 광고를 뿌리는 일을 하였다. 하루는 층집의 집집 문틈에 광고를 끼여놓고 거리의 전선대에 광고를 부치다가 경찰에 붙들려 파출소에 끌려가서 벌금을 물고 나왔다. 시장에서 강냉이를 도매하여 길가에서 파는데 그것도 순경차를 피하여 팔아야 하였으니 고달팠다. 그때 나는 실업걱정 없이 일하면서 병이 생겨도 무상치료를 받을수 있는 사회주의 우리조국이 한없이 부러웠다.

안해가 심양에 돌아간 사촌동생을 만났다며 울면서 돌아오라고 하여 나는 심양에 다시 돌아왔다. 반년넘어 보는 안해와 자식이지만 미안하였다. 안해에게 돈만써서 미안하다고 하니 안해는 울었다. 그렇게 강한 안해가 우는것을 보고 나는 가슴이 아팠다. 시간이 약이라고 반년넘어 나는 고통속에서 헤여나오기 시작하였다. 심전에서 집없는 사람들을 목격하고 나도 일하면 살수있다는 신심을 가지였다.

 며칠동안이나 나는 안해에게 나의 속심을 털어놓았다.

불고기설비공장을 하겠다고 안해에게 제의하니 안해는 돈이 없어 다음에 보자고 하였다. 지금이 기회이니 먼저 연통을 만들면서 벌어서 하면 된다고 설복하여 천원을 밑천으로 받았다.

길가의 자그마한 이동집을 세맡고  연통을 만드는 공구와 재료를 구입하여 연통을 만들면서 식당의 연통을 설치한다는 명함도 뿌리였다. 일감이 조금씩 들어와 불고기 식당의 연통들을 설치하기 시작하였다.

반년쯤 일하여 수동골절기를 만들었다. 유압기와 절단기를 샀다. 심양시 서탑에서 불고기설비들을 파는 상점과 호혜관계를 맺어 일을 주문받았다. 일을 제것처럼하여 일감도 차츰 많아졌다. 나는 실업의 고통을 잊지않고 부지런히 배우고 일하며 설비도 갱신하고 규모도 늘이였다. 나는 아무리 어려워도 주저하지 않고 적극적인 태도로 열심히 노력하면 성공할수 있다는것과 결단성있는 선택이 중요하다는것을 잘 알게되였다.

나는 무섭고 어려운 고비를 넘어선후 마음이 안착되였다. 90년대 조국에서 받은 사랑과 배려에 보답할 생각을 늘 가슴속에 간직하고 심양시 공민생활에 다시 열정적으로 참가하기 시작하였다. 나의 감출줄 모르는 애국의 열정과 공민활동에 대한 애착은 심양시 공민들의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재중조선인총련합회에서는 심양시지부의 실제정황에 근거하여 나에게 심양시지부장의 중임을 맡겨주었다. 지금은 조국의 믿음으로 영광스럽게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선전국지도원으로 일하게 되였다.

나는 사진첩의 마지막장을 펼치면서 재중조선인총련합회 일군대표단으로 조국을 방문하고 만수대언덕에 높이 모신 위대한 수령님들의 동상앞에서 남긴 기념사진을 보고 또 보면서 지금은 60이 지난 몸이지만 재중총련본부일군이라는 영예를 가슴깊이 간직하고 그 어떤 천지풍파가 휘몰아쳐와도 오직 경애하는 원수님 한분만을 믿고 따르며 조직에서 필요된다면 생의 마지막순간까지 조국과 조직을 위하여 자기의 본분을 다해나가겠다고 조용히 결의를 다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