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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2-12 09:23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7,996   추천 : 0  

[대담]정보부출신 박기식 선생, 촛불시위를 말한다
 
정보원 출신 박기식 선생(84)은 현지에서 가진 특별대담을 통해 “박근혜 대선결과는 불법”이라고 지적하고 “미국 같으면 워터게이트 사건보다 더 심각한 사건으로 그 선거는 무효가 되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그는 한국의 지난 대선과 관련하여 “박근혜 대선결과는 박정희 군사정권 시대의 부정선거와 형태는 다르지만 내용에 있어서는 둘다 부정선거에 해당된다”고 분석한다.
한때 정보원으로 활동하다가 양심상 더 이상 지속할 수 없어 그 자리를 떠나 1972년 4월 미국에 와서 살아온지 41년이 된 박기식 선생은 1973년 8월8일 일본 도꾜에서 한국정보부에 의해 납치된 사건이 발생되자 김대중 선생 구명운동이 전개되던 시기에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한국민주화 운동의 길에 들어서게 되었다고 회고 한다.
1973년 9월초  보스턴 하바드대학에서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케네디 대통령 시절에 주일미국대사 역임), 젤롬 코헨(하바드 법대교수), 그리고 그레고리 헨더슨(터프트 대학 교수) 등이 후원한 강연회에 임창영 박사(유엔 대사역임), 선우학원 교수(미조리 대학 정치학과 교수), 그리고 김상돈 선생(민선 서울시장) 등의 연설을 듣고 인생의 행로를 바꾸게 된 것이 전직 정보원이었던 박기식 선생의 고백이다.
기자는 1일 박기식 선생을 만나 일문 일답으로 그가 바라본 박근혜 대선결과에 대해 알아본다.
[질문-1]박근혜 대선결과에 대해 어떻게 보십니까?
(대답) 한마디 말하면 불법선거라고 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선거는 당연히 무효가 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기 때문에 지금 촛불시위들이 각계 각층에서 일어나고 있습니다. 한국의 일반 언론들이나 해외동포사회의 일반 동포언론들도 이에 대해서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제대로 보도하지 않고 아예 보도를 하지 않고 있습니다.
 
[질문-2]국정원 개입불법 선거를 어떻게 보십니까?
(대답) 사실상 불법선거지만 이번 선거만이 아니라 박정희 대 김대중 대결의 대선에서도 형태는 달랐지만 그것 또한 불법선거였습니다. 1963년 군정에서 민정으로 이양하는 선거였는데 그 때도 부정불법 선거였습니다. 그 때 제가 경북대구지구로 정보부 요원으로 파송되었는데 저를 비롯한 정보부 대외조정관들은 붉은 줄이 두개 있는 특별신분증을 소지하고 있었습니다. 이 신분증에는 “이 사람은 국가를 위하여 제한없이 행동한다”라고 씌어 있었고 발행인들은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박정희, 중앙정보부장 김종필’이라고 표기되어 있었습니다.
[질문-3] 이 특별신분증으로 무엇을 어떻게 할 수 있었는지요?
(대답)군수, 경찰서장 및 모든 기관들의 협조를 통하여 선거자체를 관변일변도로 조종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마치 암행어사 마패와 같은 것으로 부정선거를 만드는데 이용되었습니다.  
[질문-4] 유신전 마지막 대선이었던 1971년 박정희 대 김대중 대선의 경우에는 어떠했습니까?
(대답)이문동에 있던 중앙정보부 학교에 모든 정보부 조정관들을 소집하여 김대중을 흡집내는 흑색선전을 모의획책하여 유포시키는 활동도 서슴치 않았습니다. 그 때 만들어 진 과도적 편제로 판단기획실(판기실)이 있었는데 김성락씨(합동통신 정치기자 출신)가 실장으로 지휘했습니다. 그 때의 흑색선전 공작은 김대중 후보가 나쁘다는 선전내용들을 조작하여 뿌리면서 ‘아니면 말고식’ 내용들로 가득차 있었는데 이것은 마치도 이번 박근혜 선거에서도 비슷한 양상이 있었습니다. 예를 들면 노인들에게 20만원씨기 주기로 하고 득표에 이용되었으나 선거가 지난 지금에 와서는 공약을 이행하지 않는 그런 방법도 있었고,  그리고 ‘아니면 말고식” 흑색선전도 여러가지들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따지고 보면 이런 것들도 부정선거에 해당된다고 생각합니다.
[질문-5]선생님도 아시다시피 지금은 분단시대인데 어떻게 하면 조국이 통일을 이룰수 있는가에 대하여 지도자들이 관심을 가져야 하는데 그렇지 않은 것이 안타깝습니다.
(대답)제가 생각하기에는 정권안보도 중요하지만 그 보다는 분단시대에 살고 있는 우리로서는 민족안보가 더욱 더 중요하다고 강조하고 싶습니다. 왜냐하면 우리 역사를 돌이켜 보면 일본이나 주변국들에 대한 안보를 더 심각하게 생각하여야 하는데 통일을 할 대상인 북측에 대해서 한층 더 적대의식을 조장하는 것은 바람직 하지 않다고 봅니다. 독일의 경우에 서독이 동독에 대해 화해협력 해 온 자세들을 타산지석으로 삼으면 좋겠는데 그렇지 못한 것이 가슴 아픕니다.
[질문-6]촛불 시위가  국내외에 확산되고 있는데 조,중,동을 포함한 보수족벌언론들은 이에 대해 외면하고 있는데 이것에 대한 의견은 어떠하신지요?
(대답)조선일보 주필이었던 최석재도 그 당시 지금처럼 글을 쓰지 않았습니다. 동아일보도 정부가 광고주들에게 압박을 가했을 때  저항자세를 보이며 국민광고로 대치하였던 시절도 있었는데 요즘의 언론들은 그런 저항정신은 커녕 전혀 역사의식이 없다는데 안타까움을 금할 길 없습니다. 물론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정부에 들어와 전면적으로 언론을 탄압하고 장악한데도 문제가 있으나 언론인들 자신의 각성도 부재한 현상에 대해서 말할 수 없는 분노를 느끼게 합니다. 그렇지만 소수의 언론들, 한국의 자주민보, 통일뉴스, 민중의 소리, 오마이뉴스, 민족21 같은 언론들이 정부의 탄압에 얼마나 잘 견뎌낼지 우려하고 있는 심정입니다.  그리고 해외민족언론인 ‘민족통신’ 등도 나름대로 제 소리를 내고 있으나 어려가지 어려움으로 앞으로 이러한 난관을 극복해 낼지도 염려스럽습니다.
[질문-7]선생님은 촛불시위의 성격과 그 전망을 어떻게 보십니까?
(대답)이제 촛불이 한국의 보수지역으로 알려진 대구에까지 확산되고 있는 줄로 압니다. 특히 천주교 대구교구의 성직자들도 촛불을 들고 일어서고 있는 상황입니다. 여기에 재미동포들을 비롯하여 해외동포들까지 촛불을 이어 받아 확산시키고 있습니다. 이러한 현상은 민심을 대변하는 것으로 한국의 양심을 반영한다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하여 박근혜정부가 제대로 대응하지 않고 외면한다면 이것이 곪아 터질수 있다고 생각됩니다. 그렇게 되면 박근혜대통령도 아버지의 비극의 전철을 밟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민심을 잘 읽고 대처한다면 아버지의 과거사에서 어두운 측면을 해소하는데 일조를 할 수 있다고 봅니다. 촛불은 쉽게 꺼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박근혜정부가 민심에 대해 우유부단한 자세를 고수한다면 그 촛불은 더 활활 타오를 것입니다.
[질문-8]박근혜 정부에게 선생님이 바라는 것이 있다면 한마디 부탁합니다.
(대답)박근혜 대통령은 이미 평양을 방문하여 최고지도자를 만난 경험도 있고, 북에 대하여 알만큼 이해력도 갖고 있는 줄 압니다. 아쉬운 것은 결단력이 부족한 것 같고, 인의 장벽으로 뭔가 하지 못하고 있는점도 없지 않은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북과 미국과의 관계에서 핵문제를 다루는데 여기에 박근혜정부가 끼어들어 반대하고 방해하는 것은 볼상 사납게 보입니다. 북의 핵은 미국과의 흥정용이지 한국과의 흥정용은 결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게다가 같은 동족으로서는 할 짓을 다하고 그 다음에 이러쿵 저러쿵하는 것은 몰라도 그렇게 하지 않으면서… 이러한 상황이 안타깝습니다.
[질문-9]마지막으로 북녘에 대해 하고 싶은 말씀이 있으시다면…?
(대답)경제에 많이 치중하고 있는줄 알지만 일심단결의 초인적인 결실로 북녘동포들이 하루속히 풍요를 누릴 수 있는 경제대국으로 발전할 것을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무진장한 지하자원이 남북 전 민족의 역량으로 될 수 있도록 평화통일의 큰 몫을 하기를 기대해 봅니다. / 민족통신
 
 
특별대담을 마치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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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기식 선생은 기자와 대담시간을 마치고 보스턴의 동북쪽 50마일 가량되는 거리에 있는 미국 최초유학생 유길준(1856~1914) 유학 다니던 Governer’s Academy 캠퍼스로 안내했다. 8순이 넘는 나이에 젊은이처럼 운전하며 달리던 선생은 유길준은 1884년부터 학교에 다녔다면서 귀국하여 서유견문기 써서 주목을 받은 인물이라고 설명한다.
학교에서 기념촬영한 곳에는 뉴잉글랜드  지역 동포이민1백년 기념사업회(버몬, 매사추세츠, 로드아이랜드, 메인, 뉴햄프셔) 2003 419일에 유길준을 회고하여 동판제작한  기념비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