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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1-04 11:31
불멸의 발자취—무정부주의자 류자명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566   추천 : 0  

우리 민족 독립운동사에는 중요한 정치리념의 하나로 무정부주의가 있었다. 무정부주의(無政府主義)는 서방 리론으로서 유럽의 그리스어 《아나르코(anarchos)》에서 기원한다. 아나르코란 지배자가 없다는 뜻이다.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자유롭게 살아가는 세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때문에 지금 많은 저서들은 무정부주의를 아나키즘(Anarchism)이라고 하지만 이 사상이 동방으로 전파될 때 일본학자에 의해 무정부주의로 번역되면서 계속 무정부주의라는 표현을 쓰게 되였다.

우리 민족 독립운동사에서 리회영(李會榮), 정화암(鄭華巖)과 함께 무정부주의 대표로 평가받고있는 반일투사가 바로 류자명이다. 이들은 모든 지배자와 억압자들을 반대하고 개인의 절대적 자유를 숭상하는 무정부주의 리념으로 일본침략자들을 반대하고 자유로운 조선을 건립하기 위한 항쟁에 나섰던것이다. 류자명은 중국망명후 의렬단에 참가해 요원으로 활약하였으며 조선혁명자련맹을 이끌고 중국내 조선혁명자들의 통합을 위한 조선민족전선련맹의 구축을 적극 주도한 지도자의 한사람이다.

2003년 10월 28일에 답사팀은 북경의 유명한 관광명소인 북해공원(北海公園)에서 류자명의 딸 류득로(柳得櫓) 녀사를 만났다. 편한 양복을 입은 류득로녀사는 부리부리한 두눈이 매우 인상적이였다.

강한 인테리적 느낌을 주는 그는 중국과학기술대학(中國科學技術大學) 재료물리(材料物理)와 화학학부 교수, 박사 지도교원으로 사업하고있었다.

북해공원의 조용한 곳을 찾아 자리를 정해 앉은후 류득로녀사는 아버지의 이야기를 시작하였다.

"아버지께서는 다년간 비밀활동을 하셨기때문에 많은 일들이 알려지지 않고있습니다. 그리고 평소에 아버님은 말쑤가 적으셔서 우리에게 이야기하지 않았고 어머님도 이야기하지 않아 우리도 잘 모릅니다. 생활면에서 보면 아버지는 매우 검소한분입니다. 밥 한그릇에 김치가 있으면 식사가 되지요. 우리 집 김치는 아버지께서 담그는 방법을 가르쳐서 어머니가 알게 되였고 저도 배워서 좀 담글수 있습니다. 아버지께서는 김치를 아주 즐겨 잡수셨거든요. 그리고 아침에는 차를 마십니다. 그이는 노래도 하지 않았고 춤도 몰랐습니다. 언제나 엄숙한 표정이셨습니다. 젊었을 때는 수영을 좀 했다고 하지요. 그리고 바둑을 좀 알뿐 기타 문예활동은 몰랐습니다. 젊어서부터 그러셨나 봅니다."

딸 류득로녀사가 회억하는 류자명은 언제나 소박하고 엄숙한 사람이였다. 다년간의 혁명활동에 종사하는가운데서 형성된 성격일것이다.

류자명(1894-1985), 그는 충청북도 충주(忠州)에서 태여났다. 3남매중 막내로 태여난 그의 원명은 류흥식(柳興湜)이였고 류자명은 중국내에서 활동할 때 사용하던 이름이였다. 1910년에 충주보통학교를 졸업한 그는 부모들의 의사에 따라 봉건혼인을 치르고 이듬해 충주공립보통학교에 입학하였다. 어려서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워온 류자명은 그후 수원(水原)농림학교를 졸업하고 충주간이농업학교(簡易農業學校)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다가 "3.1"운동을 겪게 되였다. 그는 학생중심의 시위를 계획한것으로 일본경찰의 감시를 받게 되여 중국 상해로 망명하였다.

상해에서 류자명은 림시정부 충청도 대표의원으로 선출되여 한동안 활동하다가 1921년 서울을 거쳐 중국 북경에 도착하였다.

북경, 천진 지역에서 류자명은 신채호, 김약산을 비롯한 혁명자들을 만나 의렬단의 요원으로 활동하기 시작하였다. 그는 김약산의 부탁을 받고 단채 신채호를 만나 함께 의렬단선언을 작성하였다. 1923년에 의렬단 선언인 "조선혁명선언"이 발표되여 조선혁명가들의 심금을 크게 울려주었다.

이 시기 류자명은 또 조선식산은행(朝鮮殖産銀行)과 동양척식회사(東洋拓植會社)에 폭탄을 던진 의사 라석주(羅錫疇)의 의거를 비롯해 의렬단의 수차 의거에 깊이 관여하는 등 활동력을 보였다.

1927년 2월, 류자명은 김규식을 비롯한 혁명자들과 함께 남경에서 동방피압박민족련합회(東方被壓迫民族聯合會)를 조직하였다. 동방피압박련합회는 국민당의 후원을 받았고 회장에 김규식을 선출하였으며 기관지 《동방민족》을 영문, 중문, 조선문으로 발간하였다. 류자명은 련합회의 각국 대표들의 련락과 비밀지부 설립, 영향력 확장 등 사무에 참가하였다.

1930년대 류자명은 상해에서 많이 활동하였다. 그는 상해 강만(江灣)에 위치한 농업학교 립달학원(立達學院)에서 교원으로 사업하면서 남화한인청년련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결성하고 남화통신(南華通信)을 간행하였다. 당시 상해에는 리회영, 정화암, 류수인(柳秀人), 박기성(朴基成)을 비롯한 많은 무정부주의자들이 모여있었다. 이들은 1931년 9월 18일 일본의 중국 동북 3성 강점과 더불어 남화한인청년련맹을 조직하여 반일사상을 적극 선전하였고 비밀결사를 조직해 친일파들을 응징하였다.

1937년 7월 7일, 중국의 전면적인 항일전쟁이 폭발하자 류자명은 조선혁명자들의 통일전선을 도모하였다. 줄곧 평범한 교원의 신분으로 비밀적으로 반일투쟁을 전개하던 그는 이 시기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활동을 적극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이해 류자명은 남화한인청년련맹의 주요 맹원들을 토대로 조선혁명자련맹을 조직하였다. 조선총독부 경무국 자료를 보면 류자명이 조선혁명자련맹의 위원장을 맡고 류기석(柳基石), 박성기, 리승래(李升來), 정화암, 리종봉(李鐘鳳)이 위원으로 있었다. 그후 더욱 광범위한 통일전선조직을 구성하기 위하여 류자명은 조선혁명자련맹을 이끌고 조선민족혁명당, 조선민족해방자동맹, 조선청년전위동맹(朝鮮靑年前衛同盟) 등 단체들과 함께 민족련합전선인 조선민족전선련맹을 묶었다. 그는 김원봉, 김규광, 최창익(崔昌益 일명 리건우 李健宇)과 더불어 이 련맹의 대표자의 한사람으로 활동하였다.

남경이 일제에게 함락된후 련맹은 무한으로 옮겼다. 1938년 4월 10일 조선민족전선련맹의 기관지인 《조선민족전선》창간호에는 련맹이 결성된 경위에 대한 류자명의 설명이 실렸다. 류자명은 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본 련맹은 주의나 사상이 각이한 단체들이 자기의 립장과 조직을 확보하면서 공동한 강령에 따라 실행하는 련합적인 조직이다. 련합전선(聯合戰線)의 전범이라고 할수 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련맹을 절대 조선혁명대중의 머리우에 군림한 지도단체로 간주하지 않는다. 우리는 련맹을 가장 완벽한 전민족의 통일전선을 구축하는 시점으로 할뿐이다. 때문에 가장 완벽한 통일전선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전선통일에 적극 노력해야한다. 우리는 이러한 통일전선이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는 투쟁에서나 미래 독립되고 자유롭고 행복한 국가를 건립할 때에나 모두 여러 당파의 공동노력을 수요한다는것을 굳게 믿는다. 오직 이렇게 해야만이 진정 조선민족의 자유롭고 행복한 생활을 가져올수 있기 때문이다."

무한에서 류자명은 조선민족전선련맹의 대표리사의 한사람으로 조선의용대의 창립에 참여하였다. 그는 김원봉, 김규광, 김학무와 더불어 조선의용대 지도위원 사업을 맡아보았다. 무한이 함락된후 류자명은 김원봉과 함께 여러 곳을 거쳐 중경에 갔다.

어려서부터 농학자의 꿈을 키워온 류자명은 1941년 중경을 떠나 복건성 농업개진처의 농업실험장에서 사업하였다. 그는 복건성 영안(永安)에 거처를 잡고 농예연구와 농작물 재배실험에 달라붙었다.

농예면에서 일정한 성과를 올렸기때문에 중국의 관련 학자들과 고위관원들이 류자명을 주목하게 되였고 여러 곳에서 초청이 오기도 하였다. 그는 계림(桂林)에 농장을 세우고 농업기술을 지도하였다.

1943년 류자명은 중경으로 갔다. 그는 농장운영에 관련해 중경의 고위관원들을 만나고 또 중경에 있는 조선혁명가들인 김구와 김약산의 단합을 촉구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1944년 일본침략자들은 불리해진 정세를 돌려세우기 위해 발악적인 전역을 발동하였다. 일제는 중국내의 주력부대를 집중하여 예상계(豫湘桂)전역을 감행하여 하남, 호남, 광서의 많은 지역을 점령하고 국민당군에게 커다란 타격을 주었다. 이해 류자명은 중경에 가서 조선혁명 각 당파 통일회의에 참가하고 림시정부 헌법기초위원의 한사람으로 일했다.

일제가 계림으로 공격해 오자 류자명일가는 다시 복건성 영안으로 갔다. 그는 영안에서 전시 고아들을 거두어주는 강락신촌(康樂新村)에서 일을 보다가 항일전쟁승리의 소식을 접하게 되였다.

류자명은 1946년 대만 장관공서(長官公署) 농림처에서 기술실 주임으로 사업하다가 "대만농업실험소"소장을 맡았다. 대만농업실험소는 중국의 첫 농업과학연구소였다. 그후 류자명은 조선으로 가려 했지만 일이 쉽게 풀리지 않았다. 그는 향항을 거쳐 상해에 왔다가 1950년부터 호남성 장사(長沙)에서 호남대학 농예학부 주임으로 사업하게 되였다.

그때로부터 수십년간 류자명은 농학교수로, 교육자로 많은 연구를 하였고 새로 탄생한 공화국의 농예사업에 큰 기여를 하였다. 류자명은 원예면에서 지위가 매우 높았다. 특히 그는 포도재배에서 많은 성과를 거두었다. 호남에는 포도를 재배하지 못하는줄 알았지만 그의 연구로 하여 포도재배에 성공하게 되였다. 호남에는 여러 종류의 귤이 많았는데 류자명은 귤전문가로 소문이 높았다. 그리고 마왕퇴에서 출토한 농작물과 중국벼의 기원이란 론문을 발표해 국제사회의 광범위한 주목을 받기도 하였다.

류자명의 딸 류득로녀사는 "호남대학에 2급 로임을 받는 사람은 아버지와 부교장 두사람"뿐이라고 하였다.

호남대학 학생들은 류자명의 집을 제집 나들듯 다녔다고 한다. 또 일부 학생들이 일본어를 배우려 하자 류자명은 일어교원은 아니였지만 스스로 교과서를 만들어 학생들을 배워주기도 하였다. 그는 늘 농장이나 밭에서 학생들을 가르쳤고 연구사업에 몰두하였다.

류자명은 만년을 비교적 편하게 보냈다. 비록 문화대혁명의 시련도 있었지만 그는 국적이 조선이였고 또한 주변의 많은 사람들과 잘 친했기때문에 욕을 보지 않았다.

당시 호남농업대학 지도부와 교원, 학생들은 모두 류자명과 가까이 지냈으며 그를 존경하였다. 문화대혁명시기 집문앞에 "국제우호인사 류자명선생댁이니 돌입하지 말라"는 간판을 붙여놓았다. 때문에 그는 동란기를 무난히 넘길수 있었다.

류자명은 또 중국의 대문호인 파금(巴金)과도 매우 친숙하게 보냈다. 중국의 대표적인 무정부주의자였던 파금은 무한에서 류자명을 알게 되였고 그때부터 뜻을 같이한 두사람의 우정이 시작되였다. 비록 늘 함께 있지 않았지만 해방후에도 파금과 류자명은 계속 가까이 친하는 훌륭한 벗이였다.

중국에서 우수한 농학자로 사업해 온 류자명은 1985년 4월 17일 호남성 장사에서 파란만장한 한생을 마쳤다. 그는 세상 뜰 때까지 끝내는 다시 조선에 가지 못하고 말았다.

북해공원의 시원한 바람결에 나뭇가지가 흔들린다. 류득로녀사는 정히 보관해두었던 사진과 자료들을 펼쳐들면서 우리에게 설명해주었다. 청년시절의 류자명, 농학자로서의 류자명, 백범(白凡) 김구와 함께 찍은 사진들이 있었다.

확고한 무정부주의 리념으로 모든 인간의 평등을 주장하였던 류자명은 아무런 정치적 야심도 없이 오로지 민족의 해방과 전반 약소민족의 해방을 위해 묵묵히 항쟁해온 투사이다. 그는 평범함 학자의 신분으로 반일투쟁을 전개했으며 각 파 정치세력이 첨예한 모순을 드러낼 때는 조용히 다시 학자의 신분으로 세상을 지켜보았다. 전반 인민의 광범위한 의지와 요구는 꼭 실현될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세상을 바라보며 살아왔던것이다.

북해공원에서 이야기하는 최룡수교수와 류자명의 딸 류득로녀사.  / 길림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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