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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1-04 11:25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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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용군 총사령 무정장군은 1905년 조선 함경북도 경성군에서 출생하였고 원명이 김무정이다. 청소년시절 서울에서 공부하면서 가난때문에 학비를 물지 못해 늘 학교에서 나가군 하였다. 이 시기 조선혁명가 려운형을 만나 혁명의 도리를 깨우치게 되고 일제침략자들의 압박과 착취에 반항하여 싸우는 학생운동 , 로동운동에 뛰여든다. 그는 연속 감옥살이를 하고 사형에 언도되기도 하였지만 요행 구원되여 중국으로 망명의 길에 오른다.

1924년 지하혁명조직의 주선으로 하남성 보정군관학교 포병과를 졸업하고 1925년 북경에서 중국공산당에 가입한다. 그때 그는 겨우 스무살이였다. 그후 그는 중공상해조선인지부에 가 사업하게 되며 또 조직의 파견을 받고 중국로농홍군에 참가하여 홍군제3군단 전위서기 팽덕회의 수하에서 홍군패장으로 사업하였다.

그는 전사들에게 포를 쏘는 방법을 통속적으로 가르치면서 요령을 장악하도록 하여 악주를 공격하는 미, 영, 일 제국주의 군함을 향해 포를 쏘아 10여척의 군함을 명중함으로써 그번 전투에서 큰 공을 세웠다. 이때로부터 무정의 이름은 전 홍군에 전해졌고 조선인이 홍군에 있다는 소문이 파다하게 퍼졌다. 이때 홍군에서 포를 쏠줄 아는 사람은 팽덕회와 무정뿐이였다고 한다.

1934년 10월, 중국로농홍군은 2만 5000리 장정을 시작하였다. 무정은 홍군 제3군단에서 팽덕회를 따라 장정길에 올랐다. 대도하를 건너고 설산을 넘어 파서에 이르렀을 때, 장국도의 모략으로 각 군과 군 사이, 각 군과 모택동주석과의 련계가 끊어졌다. 이 음모를 분쇄하려면 홍군제1군단과의 무전련계를 맺어야 했다. 관건적인 시각 팽덕회는 이 임무를 무정에게 맡겼다. 무정은 지남침 하나 들고 허허 벌판을 헤매며 드디여 제1군단을 따라잡고 무전암호를 넘겨줌으로써 모택동과 제1군단과의 련계를 가질수 있게 되여 전반전역이 관건적인 역경을 넘게 되였다. 당시 중앙홍군에는 조선인이 10여명 있었으나 장정도중 모두 희생되고 무정과 양림만이 살아남았다. 황하를 건너 도정하는 작전중에서 양림 또한 영용히 희생된다. 이리하여 장정에 참가하여 연안에 당도한 조선인은 무정 한사람뿐이였다.

무정장군은 연안홍군대학 특과영 영장으로, 팔로군총부 작전과장으로, 팔로군 첫 포병퇀 퇀장으로 주덕과 팽덕회의 사랑과 신임을 받았다. 그는 또 중외를 진감하는 백퇀대전에서 적의 또치까를 백발백중하여 보병들의 작전을 엄호하고 진격로를 열어주어 승리를 전취하는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

백퇀대전이 끝난후 무정장군은 당중앙의 지시에 따라 관내 여러 지방에서 활동하고있는 조선인항일단체들의 통일과 련합에 대한 지도사업을 맡아나섰다.

1941년 1월 10일, 태항산혁명근거지에서 무정, 진광화, 리유민 등 조선혁명가들은 화북조선청년련합회를 결성하였다. 창립대회에서 각지에서 파견된 21명 대표들이 팔로군 포병퇀 제1임 퇀장 무정을 련합회 회장으로, 진동남 항일근거지 선전극단의 단장 진광화를 부회장으로 선거하고 구체조직은 진광화가 맡았다.

조선혁명가들은 열렬한 토론을 거쳐 계급과 당파, 종교를 불문하고 전 민족이 하나로 단결된 반일통일전선을 결성하고 화북망명청년들의 단합과 항일무장대오를 결성하며 전반 조선민족해방전쟁의 발동과 중국항일전쟁에 적극 참가하고 일제구축과 조국광복 대업을 완성한다는 등 내용의 련합회 강령과 선언문을 채택하였다.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의용대의 팔로군지구로의 이동을 조직하여 조선의용대 주력부대의 태항산근거지로의 북상항일을 이루었다.

조선의용대가 태항산에서 활발한 대적선전활동을 전개함으로써 화북에 있던 많은 조선이주민들이 조선인 항일부대가 있다는것을 알게 되였다. 수많은 열혈 조선청년들과 일제에 강제로 끌려간 조선인 병사들은 기회를 타서 조선의용대를 찾아왔다. 조선의용대와 화북조선청년련합회는 신속히 장대해져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직을 재정비할 시점에 이르렀다.

1942년 5월 일제와의 반소탕전에서 팔로군과 함께 근거지를 지켜낸 화북조선청년련합회에서는 7월 14일부터 하북성 섭현 중원향 중원촌에서 화북조선청년련합회 제2차 대회를 열었다. 이 대회에서 화북조선독립동맹(華北朝鮮獨立同盟)을 결성하고 조선의용대를 조선의용군으로 개편하였다. 그리하여 조선청년련합회는 조선독립동맹으로 결성되였고 조선의용대 화북지대는 조선의용군 화북지대로 개칭되였다. 중공중앙에서는 무정장군을 조선의용군 총사령원으로 임명하였다.

태항산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가 창설됨으로써 중국 관내 조선인 반일투쟁사에서 중요한 의의를 가지게 되였다. 조선독립동맹은 각지에 지하투쟁일군을 파견하여 더욱 많은 조선청년들을 단합시켰으며 중국공산당과 적극 협력하여 일제와의 최후승리를 준비해나갔다. 그들은 중국공산당 중앙이 소재한 연안뿐만 아니라 팔로군이 통제하고있는 광활한 적후항일근거지에서 활동했으며 강남의 신사군에도 간부들을 파견해 중국의 항일전쟁을 적극 지원하였다.

조선혁명가들과 조선의용군 화북지대 장병들은 대생산운동에 적극 참가하는 동시에 적후 항일근거지에서 적과 싸웠으며 무장선전, 정보수집, 포로교양을 진행함으로써 조선의용군의 력량을 크게 확대시켜나갔고 또한 중국항일전쟁에 큰 기여를 하였다.

력사탐방일행은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탄생한 력사적의의를 가지는 현장인 중원촌 원정사로 갔다. 당년의 흙토담이 의연히 유구한 세월의 흔적을 보유한채로 서있었다. 그안에는 옛 절당이 있었는데 울안은 널직하였고 주위는 4합원으로 된 건물이 둘러있었다. 바로 그 울안에서 조선독립동맹과 조선의용군이 탄생하였다고 한다.

거기엔 또 "원정사문물보호구(文物保護區)", "태항신화일보구지(太行新華日報舊址)"라는 작은 간판도 벽에 걸려있었다. 《조선의용군주둔옛터》라는 새 간판을 건 한 공칸은 당년 팔로군호위병의 후손인 위연평(魏延平)이라고 하는이가 개인의 사재를 털어 "조선의용군전시관"을 꾸리며 이 옛터를 관리하고있었다. 전시관은 매우 검소하고 "보잘것 없지만" 사료적가치가 있는 당년의 사진과 보도기사들이 눈에 띄였고 다른 전시관에서는 찾아볼수 없는 그의 부친과 의용군전사들이 함께 찍은 기념사진이며 유물들을 소장하고있어 그 정성과 성의를 느낄수 있었다.

그의 부친은 당년 조선의용군과 함께 태권도를 익혀가면서 팔로군수장들을 호위했다고 한다. 그는 지금 태권도를 배워 학생들에게 가르치고있었는데 무더운 여름날, 학생들의 태권도 표현에 이어 손수 주먹땀을 흘리면서 창돌리기표현을 하였다. 그는 자기 부친은 생전에 늘 조선의용군들의 사적을 들려주었다고 한다. 조선의용군에 남다른 감정을 지니고있는 그는 부친의 유지를 이어받아 중한우의를 소중히 여기면서 오늘날 중한간의 실질적인 우호와 교류를 위한 사업에 기여하고싶다고 하였다.

1942년 11월 1일, 조선독립동맹은 또 이곳에 화북조선청년혁명학교(華北朝鮮靑年革命學校)를 개설하고 무정이 교장을 담임하였다. 학교는 비교적 지속적이고 체계적인 교육을 실시하였는데 화북 적점령구로부터 탈출해오는 조선인들을 교육시켜 조선의용군에 가입시켰던것이다. 학원들은 중원촌 원정보사에서 공부하였고 부근 공지에서 군사훈련을 진행하였다. 1943년에 이르러 학원수가 훨씬 많아지고 조선의용군도 확대되여 본거지를 옮기게 되였고 이 학교는 하남점진 남장촌으로 옮겨가 "화북조선혁명군정학교"로 되였다고 한다.

우리 력사탐방일행은 중원촌을 떠나 남장촌으로 갔다. 거기서 또 조선혁명군정학교의 교육장을 지냈다는 정률성에 관한 이야기도 들었다. 당년 그 험악한 전쟁년대에 학교교육과 무장투쟁을 병행해가면서 혁명의 승리를 쟁취해낸 조선의용군의 혁명적지성과 영웅기개를 다시 한번 읽을수 있게 되였다.

이어 우리는 조선의용군이 주둔하고있었다는 운두저촌으로 향하였다. 운두저촌은 하북성과 산서성의 접경지로서 산서성 좌권현 마전진(山西省左权县麻田镇) 서남단에 위치해있었다. 청장하를 건너 마을입구에 들어서는데 해묵은 홰나무가 하늘을 치받고 서있었다. 바로 그옆에 무정장군의 숙소와 조선의용군숙소 옛터가 있었다. 끼끗한 락엽송이런듯한 나무들이 대문앞에 초병처럼 서있었는데 무정장군의 숙소는 수건중이라 출입을 금하고있었다.

그 집을 마주하고 서있노라니 굳게 닫힌 널문이 불시로 벌컥 열리며 무정장군께서 당금이라도 나오시여 우리를 반겨줄것만 같은 상상과 환각이 곁들었다. "우리 조선의용군은 하나의 대학이요. 우리는 이 혁명대학에서 혁명리론을 배우고 군사리론과 군사기술을 배워야 하오; 앞으로 조선을 일본침략자들의 손에서 해방시키고 자유, 민주의 공화국을 건립하자면 우리에게 혁명적골간이 있어야 하고 군사기술이 있어야 하오.

우리는 화북에서 류랑하고있는 조선의 청년들을 여기에 불러들여야 하고 동북과 화중, 화남에서 방황하는 조선청년들을 불러들여야 하오. 그러자면 중국공산당의 령도를 받아야 하고 팔로군과 어깨겯고 싸워야 하오. 중국인민은 꼭 중국땅에서 일본제국주의를 쫓아낼것이며 우리는 꼭 중국혁명의 승리를 쟁취할뿐만아니라 력량을 키워 앞으로 조선을 해방시키고 나아가 동방피압박민족을 해방시킬것이요."

태항산근거지를 찾아온 조선청년들을 마주하고 열정적인 연설을 하는 무정장군의 목소리가 우리들의 귀전에 울리는듯하였다.

시골 흙길을 따라 마을남쪽에 이르니 높은 2층 성문이 나타났다. 성문벽에는 당년 조선의용군전사들이 써놓은 선전구호들이 일목료연하게 눈에 띄였다. 동쪽성벽에는 "왜놈의 상관놈들을 쏴죽이고 총을 메고 조선의용군을 찾아오세요"라고 씌여있었고 서쪽성벽에는 "조선말을 자유대로 쓰도록 요구하자-조선청년전"이라는 구호가 페인트덧칠이 되여있었다.

참으로 경건해지지 않을수 없는 대목이였다. 당년 항일에 자원해나선 조선청년들의 의기를 느낄수 있었고 또한 당지 촌민들이 이 구호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알수는 없어도 해를 두고 비에 씻기면 다시 덧칠을 해가면서 대를 이어 조선의용군을 기린 그 심후한 감정을 느낄수 있었다. 뿐더러 일제의 가혹한 민족적기시와 탄압속에서도, 타국땅 그 어디에서도 자기 민족 언어와 문자를 보호하고 사용하면서 민족적기개를 떨쳤던 조선의용군의 그 위용을 가슴 벅차게 느껴보았다.

오늘날 우리들이 연변조선족자치주를 일떠세우고 자치권리를 행사하며 법으로 민족언어문자를 보호하고 발전시키며 거리거리의 모든 간판들도 우리 글문자로 써가면서 민족문화를 만끽할수 있는것도 필경은 하루아침에 이뤄진것이 절대 아니였다. 우리가 살고있는 연변에서 몇천리 몇만리 밖의 태항산기슭의 한 시골마을의 성벽에 씌여진 그 조선문 선전구호는 너무나도 많은, 너무나도 심각한 의미를 사색하게 하고있었다.

태항산지구에서 조선의용군전사들이 일본노화교육을 반대하여 군중선전을 벌이고있는 장면(사진자료).
성문동쪽에 씌여진 선전구호, 70년동안 촌민들에 의해 보존되여있다  / 길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