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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09-03 09:58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2,586   추천 : 0  

새로 설계한 벼포장디자인을 토의하고 있는 김진권(오른쪽)
 
《돈은 장사로 벌어야지 농민들의 돈을 벌려는 생각은 버려야 합니다》
지난 8월 30일, 기자는 도문시공소합작련합사 실무과 과장이며 도문시화련종식농민전업합작사 김광묵사장의 소개로 도문시 월청진 고향농민전업합작사 사장이며 도문시창신벼전업농장 김진권(金鎭权,45살)농장장을 인터뷰했다.
이제 반년이면 《고향농민전업합작사》를 꾸린지 5년이 된다는 그는 늘쌍 남보다 다른 길을 걷기를 좋아한단다. 1993년에 김진권은 (나도 본때있게 살아보자!)는 야심을 품고 자신에 대한 믿음하나로 감히 도문에 진출하여 호구까지 붙혀놓고 도시생활을 시작했다.
처음에는 품팔이차수리를 시작하여 도시생활에 때가 묻자 홀로서기로 조선족들은 눈을 돌리지도 않는 폐품회수를 하며 7년간 소문없이 짭짤한 수입을 얻었다.
《돈벌이는 기회가 따라야 합니다》
김진권이 뭉치돈을 벌게 된 계기는 지난세기 말과 금세기 초 도시진출과 출국붐으로 많은 농민들이 도맡은 밭을 버리지도, 팔지도 못해 난감하고있을 때맞게 흑룡강사람이 김진권을 찾아 50여헥타르의 밭을 임대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실로 복이 저절로 굴러온 셈이였다. 그리하여 김진권은 농민들게 한무에 땅값으로 25원-30원씩 주면서 50여헥타르의 밭을 5년간을 임대맡고 흑룡강사람에게 넘겨주어 한번 거래에서 7만원을 벌었단다.
2002년도의 어느 날 김진권은 문을 닫고 버려져있는 기신촌정미소의 철물설비가 생각나서 촌주임을 찾아 정미기계설비를 팔지 않겠는가고 물었더니 정미소의 건물까지 몽땅 사란다. 생각밖에 만원에 꼬리달린 헐값으로 촌정미소를 인수한 그는 아예 6000원에 촌공사합작사까지 인수하였다.
 
2009년 농촌의 장래를 진맥하던 김진권은 그래도 남 먼저 땅을 많이 차지해야 한다는 결론을 내리고 또다시 호구까지 가지고 귀향하여 《도문시월청진고향농민전업합작사》와 《도문시창신벼전업농장》을 설립하였다.
김진권네 고향농민전업합작사는 주식제이다. 사원당 주식을 1000원으로 하고 한꺼번에 31세대의 촌민들을 고향농민전업합작사에 입사시켰다.
《고향농민전업합작사》는 벼가공과 콩기름 가공을 주업으로 하고 농민들의 량식을 회수하여 판다. 《창신벼전업농장》은 첫해는 수전 한헥타르에 땅값을 500원, 이듬해부터는 1인당 수입을 한무에 해마다 50원씩 더 올려주기로 하고 10년계약을 했는데 지금 창신벼전업농장의 총경작지면적이 수전 56헥타르, 한전 30헥타르나 된다.
《돈은 장사로 벌고 농민들의 돈을 벌려고 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는 김진권의 상도다.
김진권은 전업합작사사원들에 대한 베품은 해마다 년말총화때 현금과 현물을 분배하는 것으로 체현하고 전업농장 장원들에 대한 혜택은 땅값을 남들보다 더 후하게 결산해 주고 농민들이 농장에서 일하면 후하게 로임을 주는 것인데 1인당 1년에 년금 1만 5000원이다.
귀향농민 김진권의 고향애는 그가 운영하는 실체의 상호와 상표에서 엿볼수 있다.
그가 말하는 고향《古乡》은 귀향농민의 고향애를, 창신《昌新》은 기신촌의 원명을(원명이 昌新坪), 국가상표국에 등록한 창신쌀의 상표 곡구《谷口》는 기신촌의 별명(谷口尾)에서, 이렇게 그의 작명 모두를 고향을 살리고 고향을 지키고 고향을 자랑하려는 목적에서 어원을 찾았단다.
《기업가는 10년 이상을 내다보고 투자해야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김진권은 이미 고향농민전업합작사의 기계설비로 60만원, 농장농기계설비로 30만원을 투자해 현대적인 설비와 농법으로 합작사와 농장을 운영하는 기초상에서 올해만도 농장투자에 18만원, 합작사투자에 5만원을 투자했다. 창신쌀은 지금 북경, 상해, 광동, 서안까지 진출했는데 북경의 수요량인 500톤만 가공해도 합작사 년수입이 30-40만원이 문제없으며 북경에 보내는 주변촌들의 쌀도 이들이 가공을 맡았다.
《우리 농장의 능력으로 북경에 쌀을 500톤 공급하자면 총 100헥타르의 논이 수요되는데 이제 50헥타르를 더 늘이자면 외지를 진공하는 방법밖에 없습니다.》
김진권은 《자기가 하고싶은 일을 하는데서 보람을 느낀다》며 고향, 창신, 곡구의 래일이 밝기만 하다고 자신하였다./ 길림신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