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1.19 星期日
최근소식 | 총련합회활동 | 잡지 | 동북혁명전적지 | 민족의 숙원 통일 | 심양모란예술학교 | 공보
작성일 : 10-09-26 07:23
[북녘소식] 《그는 조중인민이 다같이 기억하는 영웅으로 력사에 남아있습니다》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507   추천 : 0  
주체99(2010)년 9월 26일 로동신문

《그는 조중인민이 다같이 기억하는 영웅으로 력사에 남아있습니다》

항일혁명투사 박락권동지와 그 유가족에게 베풀어주신 사랑과 믿음에 대한 이야기

1946년, 해방을 맞이한 온 나라는 새 조국건설로 들끓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는 항일의 혈전만리 투쟁의 길에서 쌓인 피로도 푸실사이없이 해방된 조국땅우에 새 조선을 일떠세우기 위하여 낮에 밤을 이어 분망한 나날을 보내시였다.

그러던 4월 하순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뜻밖의 가슴아픈 비보를 받게 되시였다. 그것은 중국 동북지방을 해방하는 전투들에 참가하여 무비의 영웅성과 희생성을 남김없이 발휘하던 박락권동지가 장춘해방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하였다는것이였다.

이 비보를 받으신 위대한 수령님의 안광에는 형언할수 없는 비통함이 어려있었다. 그처럼 사랑하고 기대도 크셨던 전사, 항일의 나날 언제 어디서나 수령을 받드는데서 한치의 드팀도 모르던 박락권동지, 13살의 어린 나이에 혁명에 참가하여 오랜 세월 일제와 싸워 마침내 조국해방을 맞이하였지만 해방된 조국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되여 중국혁명을 피로써 도와주다가 희생되였던것이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사랑하는 전사의 최후를 두고 너무도 가슴아프시여 박락권동무가 죽다니?! 박락권이가…라고 갈리신 음성으로 말씀하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아껴오신 전사가 떠나간것이 너무도 애석하시여 그의 이름을 부르고 또 부르시며 박락권동무는 정말 충실한 사람이였다고, 그는 언제나 혁명밖에 모르는 참된 혁명가였는데 아까운 동무를 잃었다고, 해방된 조국땅을 밟아보지 못하고 그가 영영 떠난것이 정말 가슴아프다고 말씀하시였다.

그때로부터 세월은 흘러 산천은 변하였어도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락권동지가 발휘한 위훈에 대하여 자주 추억하시면서 《박락권동무는 장춘을 해방하기 위한 전투에서 자기의 고귀한 생명을 바쳤습니다.》라고 뜨겁게 말씀하시였다.

우리는 여기에 위대한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께서 가장 숭고한 혁명적의리를 지니시고 항일혁명렬사 박락권동지와 그 유가족에게 베풀어주신 크나큰 사랑과 박락권동지가 혁명에 충실하였던 이야기중에서 아직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들의 일부를 세상에 전한다.

 

은혜로운 태양의 품에 안겨

 

항일혁명투쟁에 나섰던 투사들이 그러했던것처럼 박락권동지에게 있어서 위대한 수령님은 운명의 태양이시고 혁명의 스승이시며 어버이이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 박락권동지를 알게 되신것은 왕청지구에서 활동하시던 시기였다.

1918년 3월 함경북도에서 가난한 농민의 아들로 태여나 일제침략자들의 가혹한 탄압과 략탈로 하여 낯설은 이국땅으로 떠나가는 부모의 등에 업혀 두만강을 건느게 된 박락권동지는 일제야수들의 총검에 의해 북간도에서 일찌기 아버지를 잃게 되였다. 어린 나이에 아버지없는 슬픔, 조국이 없는 설음을 겪으며 피눈물속에서 자라난 박락권동지는 간악한 일제침략자들에 대한 불타는 증오심을 안고 13살때에 혁명에 참가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손에 무장을 잡고 조국해방의 성전에 떨쳐나선 박락권동지가 참된 혁명가로, 백절불굴의 투사로 자라나도록 걸음걸음 손잡아 이끌어주고 보살펴주시였다.

유격대에 입대한 후 적과의 싸움에서 용감무쌍한 싸움군으로 알려진 박락권동지는 1934년 봄 어느날 일제의 《토벌대》놈들과 불의에 조우하여 총격전을 벌리게 되였다. 그때 박락권동지는 16살의 나어린 유격대원이였다. 원쑤치는 싸움마다에서 언제나 남다른 용감성을 보여주군하던 박락권동지는 이날도 악착스럽게 달려드는 적들과 싸우다 그만 복부에 심한 중상을 입게 되였다.

언제인가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에 있은 일을 감명깊이 회고하시며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박락권은 왕청유격대에 있을 때 일본<토벌대>와 불의에 조우하여 총격전을 벌리다가 복부에 중상을 당한적이 있었습니다. 그는 밖으로 흘러나오는 밸을 손으로 밀어넣으면서 기여서 유격구까지 돌아왔습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락권동지가 어린 몸으로 적《토벌대》놈들과 단신으로 맞서 싸운 이 놀라운 사실을 통하여 그의 숭고한 희생정신을 더욱 가슴뜨겁게 체험하게 되시였다. 그럴수록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락권동지가 더없이 미덥고 대견스러우시였다. 나어린 유격대원인 그가 적《토벌대》와 총격전을 벌린것도 놀라운것이였지만 복부에 중상을 당하고도 겁을 먹거나 쓰러진것이 아니라 험한 산발을 한치한치 기여서 유격구까지 돌아온 그 강의성과 불굴성은 참으로 상상을 초월하였다.

그때 박락권동지가 유격구로 돌아오면서 겪은 고통은 헤아릴수없이 컸다.

박락권동지가 천신만고하여 마침내 유격구에 이르렀을 때였다. 그는 동지들에게 부상당한 몸으로 유격구로 돌아오자니 총을 도저히 가지고올수 없어 도중에 숨겨놓았다고 하면서 그 총을 가져다달라고 부탁하고는 의식을 잃었다. 바로 이러한 혁명전사였기에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락권은 나이는 어려도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감무쌍한 싸움군이고 불사조같은 혁명가이라고 높이 치하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박락권동지의 남다른 특기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박락권의 특기가 무엇인가 하면 무기를 귀신같이 다루는것입니다. 그는 무슨 무기든지 한두번만 다루어보고는 눈을 감고서도 척척 분해결합을 하였습니다. 정말 귀신같이 손쉽게 다루었습니다.》

박락권동지는 어떤 무기나 잘 다루었을뿐아니라 총을 잘 쏘는 명사수였다. 바로 그렇기때문에 적《토벌대》와 맞다들었어도 자신만만하게 단신으로 총격전을 벌리며 달려드는 놈들을 연방 쏘아눕힐수 있었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박락권동지가 치료받고있던 병실에 찾아가시여 따뜻이 위로하고 고무해주시면서 락권동무가 복부에 중상을 당하지 않았더라면 《토벌대》놈들이 동무의 솜씨있는 그 백발백중의 명중사격에 겁을 먹고 다 도망치고말았을것이라고 하시며 호탕하게 웃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렇게 여러해동안 애지중지 키워오신 불굴의 혁명투사 박락권동지를 북만의 항일련군부대에 파견해주시였다.

중국인민들과의 공동투쟁을 항일혁명의 중요한 전략적과제로 내세우시고 그 실현을 위하여 끊임없는 심혈을 기울여오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동만에서 활동하는 친솔부대의 우수한 지휘성원들과 전령병들 그리고 금싸래기같은 대원들을 북만의 항일련군부대들에 보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를 회고하시며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참군의 걸음마를 뗀지 얼마 되지 않는 북만의 항일련군부대들에서는 군정간부의 부족으로 많은 곤난을 겪고있었다. 우리는 그들의 요청에 따라 한흥권, 전창철, 박길송, 박락권, 김태준을 비롯한 간부들은 말할것도 없고 지어는 나의 전령병이였던 오대성이마저 북만에 파견하였다. 간도에서 애지중지 키운 간부들은 그때 송두리채 넘겨준셈이였다.》

북만에 파견되여간 박락권동지는 5군에 가서 처음에는 기관총수로 있었고 그후 소대장, 중대장을 하였으며 제2로군총지휘부직속 경위대장도 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멀리 북만에서 싸우는 박락권동지를 잊지 않으시고 그가 능숙한 지휘관으로, 미더운 혁명가로 자라나도록 깊은 관심을 돌리시며 극진히 보살펴주시였다. 수령님께서는 새롭게 밝히신 혁명의 전략전술적방침도 그에게 전해주시였고 때로는 변화된 혁명정세와 일제의 모략책동에 대처하여 주의를 돌려야 할 문제들에 대해서도 알려주시였다. 또 언제인가는 박락권동지가 능숙한 지휘관으로 준비할수 있도록 자신께서 집필하신 로작 《유격대동작》도 보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조국광복회를 창건하시였을 때에도 박락권동지에게 《조국광복회10대강령》을 보내주시여 그가 조국해방의 대강을 받아안고 희망과 신심에 넘쳐 싸워나가도록 이끌어주시였다. 그러시고도 박락권동지를 잊지 못하시여 북만으로 가고오는 통신원들을 만나실 때마다 늘 그의 소식을 묻군하시며 잘 싸운다는것을 아시고는 못내 기뻐하시였다.

박락권동지는 북만땅에 가서도 위대한 수령님께서 끝없이 베풀어주시는 크나큰 믿음과 뜨거운 사랑을 받아안으며 수령님의 위대성을 더욱 깊이 체득하였고 김일성장군님께서 계시는한 조선은 반드시 해방될것이라는 필승의 신념으로 가슴불태우며 맹렬한 군사정치활동을 벌려나갔다. 그 나날 박락권동지는 수많은 전투들에 참가하여 간악한 일제원쑤놈들을 무자비하게 쓸어눕히고 이르는 곳마다에서 적들로 하여금 공포에 떨게 하였으며 조중인민들에게 승리의 신심을 안겨주었다.

박락권동지는 준엄하고도 시련에 찬 혁명의 길에서 언제나 변치 않는 혁명적신념을 간직하였으며 혁명적원칙을 어떻게 지켜야 하는가를 실천으로 보여준 불굴의 투사였다. 그는 혁명적원칙성이 강하고 남달리 혁명적동지애가 높았다.

바로 이러한 그가 항일련군 5군에서 주보중의 경위대장을 하면서 국제주의적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희생적으로 싸우고있다는 소식을 들으실 때마다 우리 수령님께서는 매우 만족해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에 있은 일을 회고하시며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박락권은 북만부대에 가서 경위대장을 할 때 호위사업을 잘해서 주보중의 사랑을 많이 받았습니다. 주보중자신도 박락권의 덕으로 아슬아슬한 고비에서 여러번 구원되였다고 합니다.》

박락권동지의 군사적재능은 소부대활동시기에 더욱 두드러지게 발휘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1940년 8월 력사적인 소할바령회의에서 제시하신 방침에 따라 조국해방의 대사변을 주동적으로 맞이하기 위하여 소부대작전과 정치활동을 맹렬하게 벌리시는 한편 군정학습과 훈련을 대대적으로 조직하시고 동만과 북만에서 활동하던 부대들과 항일혁명투사들을 모두 훈련기지에 부르시였다.

항일혁명투사 최광동지는 그때에 있은 일을 자기의 회상자료에 이렇게 썼다.

《북만에 파견되여가서 싸우던 나는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1941년 4월에 박락권동무와 함께 훈련기지에 도착하여 오매에도 그리던 수령님을 만나뵙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 나와 박락권동무의 손을 잡아주시면서 수고하였소, 그동안 북만에 파견되여가서 혁명을 위하여 많은 고생을 하면서 정말 잘 싸웠소,

정말 수고하였소라고 말씀하시면서 저희들을 거듭 치하해주시였다.

훈련기지에 있을 때 박락권동무는 소부대활동에서 언제나 용감하고 총을 잘 쏘았기때문에 위대한 수령님께서 늘 그를 치하해주시였다.》

박락권동지는 소부대활동시기에 매복습격과 렬차전복전투를 능숙하게 조직지휘하였을뿐아니라 철교폭파를 특별히 잘하였다. 그는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도처에서 수많은 철교를 폭파하여 일제침략자들의 군사활동을 마비시키고 놈들을 공포와 수세에 몰아넣군하였다. 그리하여 싸움을 본때있게 하는 지휘관으로 알려지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당시 유능한 군사지휘관으로 이름날리였던 박락권동지에 대하여 회고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박락권은 물불을 가리지 않는 용감무쌍한 싸움군이였습니다. 그는 군사지휘관으로서의 기지도 있고 날파람도 있었습니다.》

이렇듯 박락권동지는 피바다, 불바다를 헤쳐야 했던 항일혁명의 준엄한 나날에 혁명가 한사람한사람을 키워주신 위대한 수령님의 은혜로운 태양의 품에 안겨 유격대의 꼬마대원으로부터 조중인민이 다 아는 유능한 군사지휘관으로 자라날수 있었다.

 

세월은 흐르고 산천은 변하여도

 

박락권동지가 조국의 해방과 함께 위대한 수령님으로부터 받은 임무는 중국 동북해방작전에 참가하는것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때를 회고하시며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는 해방후 중국 동북지방에 강건, 박락권동무를 비롯한 조선인민혁명군의 많은 지휘관들과 대원들을 파견하였으며 포병련대와 공병부대도 조직하여 보내주었습니다.》

일제가 패망한 후 중국 동북지방에는 엄중한 사태가 조성되고있었다. 장개석도당은 일제의 패망을 기회로 미국의 지원밑에 동북지역을 강점하기 위하여 발악적으로 책동하였다. 그리하여 전략적으로 중요한 중국 동북지역이 반혁명지역으로 전환될수 있는 위험이 조성되였다. 이러한 때에 주보중을 비롯한 중국의 여러 항일련군 지휘관들은 우리 수령님께 강건, 박락권, 최광동지를 비롯한 조선인민혁명군의 지휘관들과 대원들을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해줄것을 요청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중국인민의 혁명투쟁을 적극 도와주는것을 조선인민의 숭고한 국제주의적의무로 여기시고 해방된 조국땅을 밟아보지 못한 그들을 중국동북지방으로 파견하시였다.

이렇게 되여 박락권동지는 1945년 9월부터 룡정시경비사령부 부사령관으로 활동하면서 일제침략군 패잔병들과 만주괴뢰군 잔여세력, 토비들을 숙청하는 한편 장개석국민당군을 소탕하기 위한 맹렬한 전투를 벌리였다.

그는 1946년 1월 조선인민혁명군의 지휘관, 대원들과 중국 동북지방에서 살고있던 조선인청장년들을 망라하여 사단규모가 넘는 길동분구사령부 제1련대(중국혁명가들은 박락권사단이라고 부름)를 조직하였다. 그후 련대를 이끌고 장개석도당이 점령한 여러 지역을 해방해나가던 박락권동지는 4월 중순 장춘해방전투를 지휘하게 되였다. 그때 련대는 적들의 사령부가 있고 국민당군대에서 가장 악질적인 부대가 방어하고있는 적의 소굴인 은행청사를 점령하기 위한 최후결전을 벌리게 되였다. 련대 전투원들이 대동광장을 지나 은행청사를 향해 돌진해가고있을 때였다. 뜻밖에도 억척같이 닫겨있던 은행청사의 대문이 포탄에 맞아 열리게 되였다. 그러자 그안에 있던 4, 000여명의 적들이 쏟아져나오며 반공격해왔다. 한편 적들은 광장과 그 주변에 박격포사격을 미친듯이 퍼부었다. 련대의 공격은 일시 좌절되였다. 장춘해방전투의 승패가 좌우되는 참으로 위기일발의 순간이였다. 이 엄숙한 시각에 박락권동지는 자기 한목숨을 기꺼이 바칠것을 결심하고 벌떡 일어나 《전투원들이여! 악독한 국민당군놈들을 무자비하게 족치고 장춘을 기어이 해방하자!》, 《련대 돌격 앞으로!》라고 웨치며 전투원들을 결전에로 불러일으켰다. 그리고는 불사신과도 같이 탄우속을 뚫고 앞장에서 적진으로 돌격하였다. 그의 뒤를 따라 련대의 전투원들이 장춘시가 떠나갈듯한 《만세!》의 함성을 지르며 은행청사를 향해 육박해갔다.

그리하여 이날 련대는 장춘에 대한 총공격을 시작하여 5일만에 장춘시를 해방하게 되였다. 장춘이 해방됨으로써 사평계선에서 포위되여있던 팔로군부대들이 장춘을 거쳐 할빈, 목단강일대에로 진출하게 되였다. 그런데 장춘해방전투에서 박락권동지가 장렬한 최후를 마치였다. 그는 마지막순간에 동지들에게 《아! 조국땅에 나가서 김일성장군님을 한번만 더 만나뵈왔으면 한이 없겠소!… 정말 김일성장군님을 뵙고싶소!…》라는 말을 남기고 눈을 감았다. 그때 박락권동지는 28살의 너무도 애젊은 나이였다.

박락권동지가 희생된 때로부터 수개월이 지난 10월 중순 어느날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이날 중국 동북지방에서 온 20대의 한 녀성을 만나게 되시였다. 그가 바로 위대한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고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박락권동지의 부인 리옥주녀성이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리옥주녀성에 대하여 이미 알고계시였다. 그것은 해방후 박락권동지와 함께 중국 동북지방에 파견되여 싸우다 조국으로 돌아온 강건동지로부터 옥주녀성에 대한 이야기를 들으시였던것이다.

강건동지는 그날 위대한 수령님께 박락권동지가 동북해방작전에서 세운 위훈에 대하여 상세히 보고드리고 그가 결혼한데 대하여서와 그의 안해 리옥주가 어떤 녀성인가에 대하여서도 자상히 말씀드리였다.

해방전 악독한 일제놈들때문에 고향인 전천땅을 떠나 중국 룡정에 가서 살던 리옥주녀성은 16살때부터 항일성전에 나서게 되였다. 그는 반제청년동맹 성원으로 활동하면서 처음에는 지하공작원들의지도를 받으며 등사기로 삐라와 격문을 찍어 일본령사관을 비롯한 룡정시의 여러 건물담벽과 전주대들에 붙이여 일제놈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다. 그리고 목숨을 내대고 무기획득을 위한 공작도 하여 많은 무기와 탄약을 유격대에 보내주었다.

어느해 봄에는 국경일대에 나가 지하족, 광목, 식량, 소금을 비롯한 유격대원호물자를 마련해가지고 마차에 싣고가다가 적들에게 체포되여 룡정경찰서에 수개월간 감금되여 악착한 고문을 받으며 옥중투쟁도 하였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항일혁명렬사 최희숙동지의 두눈과 심장을 도려낸 악독한 살인마였던 일본군 군의 모리라는 놈을 적발하여 처단하는데도 참가하였다.

리옥주녀성은 그후 박락권동지의 지휘밑에 일제패잔병들과 악질적인 토호, 토비들을 격멸소탕하는 전투들에 참가하여 용맹하게 싸웠다. 그 과정에 그들사이에는 인연이 깊어져 결혼을 하게 되였다.

강건동지로부터 리옥주녀성에 대한 래력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몹시 갈리신 음성으로 박락권동무가 참으로 훌륭한 안해를 만나게 되였는데 그 안해를 이국땅에 혼자 남겨놓고 영영 떠나갔소, 그들 부부가 조국에 나와서 단 몇달만이라도 신혼생활을 하였어도 내 마음이 이렇게 아프지는 않을것이요라고 말씀하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남편을 잃고 이국땅에서 슬픔에 잠겨있을 리옥주녀성을 조국으로 불러주시였다. 수령님의 부르심을 받은 리옥주녀성은 한시바삐 조국에 가고싶은 생각뿐이였다. 하지만 그는 그때 임신한 몸이였고 또 해산을 앞둔 때여서 떠날수가 없었다. …

리옥주녀성이 위대한 수령님의 저택으로 찾아갔을 때였다. 항일의 녀성영웅이신 김정숙동지께서는 너무도 기뻐 문밖에까지 나오시여 《박락권동무의 아주머니가 왔단말입니까.》라고 말씀하시며 그를 반가이 맞아주시였다. 그러시고는 그의 등에 업은 애기를 받아안으시며 먼길을 오느라고 정말 고생이 많았겠다고, 장군님께서는 매일같이 락권동무의 아주머니가 오기를 기다리며 여간만 걱정하지 않으시였는데 이렇게 아들을 낳아가지고 오느라고 늦어졌구만요라고 말씀하시였다.

무척 기쁘신 마음으로 애기를 바라보시던 김정숙동지께서는 애기가 신통히도 락권동무를 닮은것 같다고 하시면서 이렇게 귀여운 아들이 태여난것도 보지 못하고 락권동무는 갔다고 하시며 옷고름으로 눈굽을 찍으시였다.

방에 들어가신 김정숙동지께서는 장군님께서 지난봄에 락권동무가 희생되였다는 비보를 받으신 날 너무도 가슴이 아프시여 온밤 잠을 이루지 못하시였다고, 그런데 희생된 전사의 안해가 아들을 낳아 업고 장군님을 찾아왔으니 이것이 얼마나 기쁜 일인가고 하시였다.

이윽고 점심시간이 되여 위대한 수령님께서 댁으로 오시였다.

김정숙동지께서는 애기를 안으시고 현관으로 들어서시는 위대한 수령님앞으로 마주가시며 장군님, 누가 왔나 보십시오, 락권동무의 안해가 이렇게 아들을 낳아가지고 왔습니다라고 말씀올리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너무도 뜻밖의 일에 놀라시며

《누가 왔다구?! 박락권동무의 안해가 왔단말입니까?…》라고 말씀하신 후 김정숙동지께서 안고계시는 애기를 받아안으시고 《어디 보자. …락권동무는 갔어도 대를 이을 아들을 남겼구만. 아들을…》하고 기쁨을 금치 못하시였다. 이때 옥주녀성이 위대한 수령님앞으로 다가와 큰절을 올리였다.

수령님께서는 애기를 다시금 김정숙동지께 안겨주시고는 옥주녀성의 두팔을 잡아일으키시며 절은 무슨 절이요, 어서 일어나오, 애기를 업고 두 나라 지경의 먼길을 오느라고 정말 고생이 많았겠소라고 다정히 말씀하시였다.

방안에 들어서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옥주녀성에게 자리를 권하시며 락권동무가 결혼하였다는 이야기는 강건동무를 통하여 이미 들었다고 하시면서 그에게 애기를 언제 낳았는가고 물으시였다.

8월에 낳았다는 대답을 들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러면 박락권동무가 희생된지 넉달후에 낳았구만, 락권동무가 넉달만 더 살았어도 아들을 볼수 있었겠는데…라고 하시며 안색을 흐리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날 친정에 찾아온 딸자식을 위하시듯 락권동무는 용감하고 배짱이 센 조선인민혁명군의 우수한 지휘관이였다고, 새 조국건설에서 한몫 단단히 할수 있는 동무였는데 너무도 일찌기 갔다고 하시면서 아주머니의 책임이 무겁다고, 아들을 잘 키워서 아버지의 뒤를 잇도록 하여야 한다고, 그러자면 우선 어머니부터 훌륭한 혁명가가 되여야 한다고, 혁명가의 안해답게 굳세게 살아야 한다고 힘과 용기를 안겨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후에도 박락권동지의 안해와 아들을 한시도 잊지 않으시고 사소한 불편이 있을세라 그들의 생활을 따뜻이 보살펴주시였다. 건국의 그날부터 남편처럼 혁명에 충실한 일군이 되여야 한다고 하시며 리옥주녀성을 사랑과 믿음으로 손잡아 이끌어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그가 유능한 녀성일군으로 자라나도록 온 나라가 불바다속에 잠긴 조국해방전쟁시기에는 멀리 외국에까지 가서 공부하도록 은정어린 조치를 취해주시였다. 전후에는 당시의 중앙당학교에서 공부한 그에게 내각의 책임적인 사업을 맡겨주시는 높은 신임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리고 박락권동지의 아들 박승태동무를 훌륭한 일군으로 키우기 위하여 만경대혁명학원에도 보내주시고 김일성종합대학에서 공부시키는 끝없는 사랑을 베풀어주시였다.

박락권동지가 우리곁을 떠난 때로부터 강산이 변한다는 10년도 몇번이나 지나갔다. 하지만 장춘해방전투에서 최후를 마친 그에 대한 우리 수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뜨거운 추억은 세월이 흐를수록 더욱 강렬하였다.

어버이수령님께서는 위대한 생애의 마지막시기에도 박락권동지가 장춘해방전투에서 세운 위훈에 대하여 뜨겁게 추억하시며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박락권은 련대를 이끌고 장춘해방전투에 참가하였습니다. …앞장에서 적진으로 돌격하다가 박격포탄파편을 여러군데 맞고 전사했다는데 최후를 박락권이답게 마쳤습니다. 그는 조중인민이 다같이 기억하는 영웅으로 력사에 남아있습니다.》

위대한 장군님께서는 장춘해방을 위한 격전장에서 일찌기 어버이수령님의 슬하를 떠나간 박락권동지에게 못다 준 사랑까지 합쳐 그의 유가족에게 크나큰 영광과 행복을 안겨주고계신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일찌기 남편을 잃고도 혁명가의 안해답게 일생을 충실하게 살아온 리옥주녀성에게 어버이수령님의 존함이 모셔진 시계를 거듭 수여해주시였으며 국기훈장 제1급을 비롯한 높은 국가표창도 안겨주도록 하시였다.

경애하는 장군님께서는 박승태동무의 성장에도 깊은 관심을 돌리시며 뜨거운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그리하여 박승태동무는 김일성종합대학을 졸업한 후 우리 장군님의 사랑과 크나큰 믿음속에서 혁명의 총을 잡고 오늘은 인민군부대의 정치일군으로 사업하고있다. 그의 두 아들도 위대한 장군님의 은혜로운 품속에서 인민군군관으로 자라나 총대로 우리 당을 받들고있다.

경애하는 김정일장군님께서는 영광스러운 항일혁명의 길에서 박락권동지가 세운 위훈을 값높이 평가하시여 대성산혁명렬사릉에 그의 반신상을 세우도록 하시였다. 그리하여 박락권동지의 참된 삶은 영생의 모습으로 빛나고있다. 그의 반신상대돌에는 이런 글발이 새겨져있다.

 

박락권동지

조선인민혁명군 지휘관

1918년 3월 3일생

1931년 혁명에 참가

1934년 조선인민혁명군 입대

1946년 4월 18일 전사

대돌 뒤면에는 《부인 리옥주 합장》이라는 글발도 새겨져있다.

20대의 꽃나이청춘을 조선혁명과 중국혁명을 위하여 바친 박락권동지의 숭고한 혁명정신은 조중인민들의 심장속에 영원히 살아있을것이며 그의 이름은 대성산혁명렬사릉과 더불어 후손만대에 길이 빛날것이다.


최 창 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