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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6-25 06:47
[남녘소식] 《물기둥, 관측장비로도 관측 불가능했다》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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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조선소식 《물기둥, 관측장비로도 관측 불가능했다》 남조선의 인터네트에 괴뢰패당이 《천안》호사건의 《조사결과》발표당시 유력한 근거의 하나로 내들었던 어뢰폭발로 인한 물기둥이 사실상 확인되지도 않았으며 확인할수도 없었다는것을 함선침몰당시 백령도감시초병의 진술자료 등을 통해 폭로하는 글이 실리였다. 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천안》호사고당시 백령도 ○○○초소에서 경계근무를 섰던 초병이 《물기둥》을 보지 못했고 볼수도 없는 상황이였다고 일관되게 진술했을뿐만아니라 직접 그린 그림에도 물기둥의 모습은 없는것으로 확인됐다. 따라서 5월 20일 《천안》호 《민군합동조사단》이 《물기둥이 존재했다.》고 제시한 가장 중요한 근거가 무너질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초 알려진것과 달리 《천안》호사고직후인 26일 오후 9시 30분경부터 해군함정 3척이 사고현장에 도착해 구조활동을 편것으로 확인되여 《합동조사단》이 발표한 9시 56분과 20여분의 차이가 있는것으로 나타나 의혹이 보태졌다. 백령도해병 ○○○초소 초병근무자 A초병의 3월 28일자 자필진술서와 B초병의 4월 2일, 4월 4일자 자필진술서에는 《물기둥은 보지 못했다.》고 명기되여있다. 밖에서 직접 《맨눈》으로 상황을 관측했던 B초병은 4월 2일자 첫번째 진술서에서 《물기둥은 보지 못했다.》고 분명히 밝혔으며 4월 4일자 두번째 진술서에서는 《물기둥 등 다른것을 보았냐고 묻는 사람은 있었지만 물기둥 등 다른것을 보지 못하였다고 했다.》고 명확히 재확인했다. 또한 그는 《날이 어두웠고 시정이 좋지 않아 (섬광)이외에 부유물, 물기둥, 초계함을 목격하지 못했다.》고 진술했으며 A초병은 《그날 해무가 심해 시정이 500m여서 ○○○(관측장비)으로 관측이 불가능했다.》고 진술했다. 따라서 A, B 초병모두 사고당시 100m높이의 물기둥을 관측했을 가능성은 없는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천안》호 《민군합동조사단》은 지난 5월 20일 《조사결과》를 발표하면서 물기둥에 대한 질문을 받고 《첫번째는 백령도초병이 해상에서 높이 100m, 폭 20~30m의 하얀 섬광기둥을 발견했다고 진술한것》을 물기둥이 존재했다는 4가지 근거중 맨 앞에 내세운바 있다. 참고로 《합동조사단》이 제시한 초병진술에 등장하는 초병은 《통일뉴스》가 확보한 자필진술서를 작성한 초병과 일치한다. 한편 이들은 《쾅》하는 폭발음을 들었고 흰색 섬광을 목격해 《천둥이나 락뢰로 추정하여 보고했다.》고 일치되게 진술했다. A초병은 《근무를 수행하던중 21시 23분에 락뢰소리와 비슷한 소리를 들어 <쿵> 소리와 함께 하얀 불빛이 ○○○초소기준 방위각 000° 4km지점에 보였다.》고 진술했다. B초병도 《<쾅>하는 소리와 동시에 4~5km로 추정되는 거리에서 하얀 빛이 퍼졌다가 소멸하는것으로 보았다.》면서 《<쾅>소리가 깜짝 놀랄 정도로》 한번 났고 《부딪치는 소리보다는 폭발음에 가까웠다.》고 진술했다. 또한 《이후에 군함이 사격하는 소리를 같은 장소에서 들었는데 당시 사격소리와 류사했고 사격소리보다 크게 들렸다.》고 덧붙였다. 특히 B초병은 자필진술서에 목격한 섬광을 그림으로 그리고 아래에 설명을 달아두었다. - B초병이 자필로 그린 그림에도 물기둥은 없으며 맨마지막에 《물기둥은 보지 못하였습니다.》라고 명확히 써놓았다. 아래에서 둘째줄 《근무자와 함께》 앞부분에 두 글자를 삭제했으며, 무인을 흐리게 처리했음 - 구조함정이 처음 도착한 시각도 초병들의 자필진술서에는 《합동조사단》의 발표보다 훨씬 이른 시각인것으로 확인되여 20여분동안의 초기구조시간에 이루어진 무엇인가를 《합동조사단》이 감추려는것은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된다. A초병은 《그후 21시 30분경 ○○○초소기준 방위각 000° 2km지점에서 해군함정 3척이 와서 구조했다.》며 《해안탐조등으로 ○○○초소근처 해안을 해군들이 이쪽으로 올수 있게 비쳤고 생존자가 있지 않을가 탐조등을 계속 비쳤다.》고 진술했으며 이후에도 계속 해군함이 도착해 구조작업에 참여했다고 적었다. 사고시각이 초병들의 시계를 기준으로 9시 23분(21시 23분)이였으므로 9시 30분에 해군함정 3척이 《와서 구조했다.》면 《합동조사단》이 지난 4월 7일 기자회견에서 《9시 56분 고속정편대 3척 현장도착 인명구조 시작》이라는 발표와 시간상 27분정도 차이가 발생한다. 물론 초병의 진술이 개략적이여서 9시 30분경부터 해군함정 3척이 이동을 시작해 9시 56분경 사고현장에 도착했다고 해석할수도 있지만 초병이 관측한 방위각과 거리를 감안하면 고속정이 전속력으로 (보통 30~40노트, 시속 60km수준)사고지점에 도착했을 경우 9시 30분경에 도착했다고 보는것이 타당할것이다 . B초병은 《구조당시에는 소형선박 3척과 초계함정도로 추정되는 큰 선박이 해상에서 계속해서 이동하며 움직이는것을 보았다.》며 《선박들이 크게 흩어지지 않고 가까운 거리에 있었다.》고 진술했다. 초병들의 초기 자필진술서에 《물기둥은 보지 못했다.》는 명백한 진술에도 불구하고 초병들이 《높이 100m, 폭 20~30m의 하얀 섬광기둥》을 목격했다고 제시한 점은 《합동조사단》이 《북 어뢰설》에 꿰맞추기 위해 초병들의 진술을 왜곡하고있다는 의혹을 살만 하다. 참고로 전날(21일) 《국회국방위》에서 《국방장관》 출신인 김장수 《한나라당》 의원이 속초함 함장이 감사원 감사당시 함정수사가 있었다고 폭로하자 김태영이 사실상 이를 시인했다. 《련합뉴스》에 따르면 김의원이 《감사관이 TOD(열상감지장치)로 반잠수정이 촬영됐다. 다른 사람이 확인한바에 따르면 20명의 공작원이 있는것도 확인되였다. 새떼가 아니라 반잠수정이였다.》며 《답변의 번복을 유도했다고 들었다.》고 들이대자 김장관은 《속초함장을 불러 2시간동안 이야기를 들어봤는데 사실인걸로 알고있다.》고 시인했다. 장교인 속초함 함장도 자신의 진술을 번복해야만 하는 상황에 놓여있는 점을 고려할 때 사병인 초병들이 자신의 최초진술을 외압에 의해 번복했는지의 여부를 확인해야 할 필요가 있다는 지적이다. 본사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