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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9-02-26 17:10
강강수월래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277  

강강수월래는 그 유래가 임진조국전쟁시기와 그 이후 청나라침략자들을 물리치던 시기와 관련되여있다.

임진조국전쟁때에 적들에게 해안을 지키는 우리의 군사가 많다는것을 보여주며 적군이 우리 해안으로 상륙하는것을 감시하기 위하여 남해안일대의 부녀자들이 많이 모여 해안부근의 산에 올라가 《강강수월래》노래를 부르면서 춤을 추었는데 그후 이것을 기념하여 달밝은 밤에 부녀자들이 《강강수월래》를 부르며 춤을 추었다고 한다.

이것이 점차 퍼져서 남해안일대에서 하나의 풍습으로 되였던것이다.

강강수월래는 매년 8월추석날에 수십명의 부녀자들이 일정한 곳에 모여 서로 손을 잡고 원형으로 둘러선 다음 《강강수월래》노래를 부르면서 빙글빙글 돌아가며 춤을 추는것이였다. 즉 강강수월래는 원형구도상에서 벌어지는 륜무의 한 형식이였다.

여기서는 먼저 목청좋은 녀성이 원가운데 서서 선창을 하면 빙 둘러선 나머지 녀인들은 후렴을 부르면서 춤을 추었다.

강강수월래는 거기에 깃들어있는 슬기롭고 용감한 우리 선조들의 투쟁정신과 더불어 근세까지 전라도, 경상도지방 부녀자들이 가장 즐겨논 놀이의 하나로서 오래동안 계승되여왔다.

가무놀이에는 반드시 악기가 따르는데 악기는 놀이의 성격에 따라 그 구성을 달리하였다. 흔히는 군중의 참가정도와 률동정도에 따라 악기를 구성하였는데 농악처럼 많은 군중이 참가하며 률동이 격렬한데는 타악기를 기본으로 하여 구성하였으며 탈놀이와 같이 극적인 성격을 띤 놀이에는 보다 선률적인 악기들로 구성하였다.

농악에는 징, 꽹과리, 장고, 북, 소고, 새납 등이 쓰이였다. 김홍도의 그림 《춤》(무악도)에 보이는 악단은 피리, 단소, 북, 장고 등 비교적 지니기에 간편한 악기들로 구성되였으며 리정보의 시(18세기)에서 보는바와 같이 향비파, 적, 피리, 장고, 무고 등으로 편성된것도 있었다.

이밖에 후기에 오면서 가야금, 거문고, 양금과 같은 실내악기들이 악단에 편입되는 경우도 있었다. 앞에서 본 야외적성격의 악기들로 이루어진 중주단은 일반적으로 《삼현륙각》이라고 하였으며 현악기를 위주로 한 중주단은 《줄풍류》라고 하였다.

삼현륙각은 무용반주와 독립적인 기악중주에도 널리 리용되였다. 이러한 몇가지 특징적인 가무놀이를 통하여 인민들이 즐겨논 가무놀이들은 우리 인민의 민족적감정을 훌륭히 반영한 귀중한 유산의 하나이라는것을 알수 있다.

가무놀이때에는 민간조직이 활동하였는데 그가운데서 특이한 자리를 차지한것은 사당패였다. 사당패는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도시와 농촌을 대상으로 활동한 노래와 춤을 전문으로 하는 민간예술단체였다.

사당패란 말은 광대들의 무리라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옛날에는 우리 나라에 배우라는 말이 없었으며 그들을 광대라고 하였다. 사당패는 바로 이 광대들의 조직의 말이며 광대들이 추는 춤을 사당춤이라고 하였다. 지난날 사당패들이 주로 절주변에 자리잡고있었던 현상만 보고 그들을 불교의 어용예술집단으로, 사당춤을 불교에서 나온 춤으로 설명한 일제어용학자들의 주장은 우리 인민의 민족문화전통을 외곡말살하려는 목적을 추구한데서 나온것이였다.

사당패들이 절주변에 자리잡고있은것은 봉건통치배들의 부역과 제재로부터 피하려는데서부터였지 결코 그들이 불교나 절과 무슨 관련이 있어서 그런것은 아니였다.

사당패는 봉건문화가 발전하던 15~16세기에 형성된것으로 볼수 있다. 이 시기에 인민들의 문화적수요가 전 시기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높아짐에 따라 노래와 춤도 더욱 발전하였다.

그 과정에 각지에 흩어져 개별적으로 활동하던 거사나 사당들이 일정한 집단을 무어 노래와 춤을 전문으로 하는 민간예술단체들을 조직하게 되였다.

거사나 사당들의 적극적인 움직임을 알수 있게 하는 기록은 《조선봉건왕조실록》의 여러곳에서 찾아볼수 있다. 이것은 당시에 거사와 사당들이 이미 중앙과 지방들에서 사당패를 무어가지고 활동하기 시작하였다는것을 말해준다.

사당패활동의 전성기는 17~18세기였는데 이때에 그들의 활동범위는 평안도, 황해도,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등의 광범한 농촌과 도시를 포괄하였다. 사당패가 쇠퇴하기 시작한것은 19세기부터였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새로운 시대를 대변하는 판소리명창들의 활동이 우세해짐과 함께 사당패의 활동은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20세기초에 조선을 강점한 일제가 우리 나라 농촌에 대한 수탈을 강화하면서 민속행사들과 집단모임을 탄압하기 시작한것과 관련하여 농촌을 대상으로 떠돌아다니면서 농민들이 희사하는 푼전에 의거하던 사당패는 더는 자기 존재를 유지할수 없게 되였다.

그리하여 사당패의 기본주류는 일자리를 구하러 도시와 농촌으로 떨어져나가고 일부는 농촌의 농악단체인 걸립패로, 다른 일부는 농촌에 정착하여 민속적인 민간놀이의 한때를 보충하는 패로 갈라지게 되였다.

여러세기동안 활동한 사당패는 본질에 있어서 인민적인 음악과 무용을 바탕으로 하여 그들의 문화적지향을 구현한 인민적인 예술인 즉 광대들의 집단이였다. 사당패의 성원들은 대개 가난과 고역속에서 살길을 찾아 모여온 농민출신의 예술가들이거나 그 후손들이였다. 따라서 사당패는 봉건통치배들로부터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았다.

사당패는 그 집단을 통솔하고 활동을 조직하는 책임자를 《화주》라고 하였다. 화주로서는 보통 조직안에서 예술적기량이 높고 신망이 있는 사람이 선출되였다. 화주밑에는 거사와 사당이 있었다.

20세기초에 전라도에서 활동한 일부 사당패는 거사가 10여명, 남사당이 10여명, 녀사당이 20명으로 구성되여있었다.

그 전성기인 17~18세기에는 더 큰 규모의것도 있었으리라고 짐작된다. 사당패는 한 집단안에서 남녀가 같이 생활하는만큼 《중법》이라는 내부규률이 매우 엄격하였으며 그것을 어겼을 경우에는 조직에서 내쫓기까지 하였다.

사당패성원들사이에는 서로 돕고 이끌어주는 화목한 생활이 지배하였다. 그들은 철저히 자기들의 생활준칙에 따라 생활하였으며 화주나 거사들은 사당들을 적극 도와주어 그들의 예술적기량을 높일수 있게 하였다.

일반사당들은 사당패에 들어온 년한과 나이에 따라 서로 존경하고 신뢰하며 친목을 두텁게 하였다. 사당패가 이처럼 화목한 집안으로 될수 있은것은 그들의 계급적처지와 활동목적이 서로 같았기때문이였다.

사당패의 활동은 근로인민들의 사랑과 지지를 받았다. 사당패들이 공연한 춤과 노래는 주로 근로하는 농민들의 사상감정과 지향을 담은것이였으며 량반통치배들의 부패무능과 봉건사회의 취약성을 폭로하는것을 기본내용으로 한것이였다.

이로부터 사당패들의 예술활동은 농민들속에서 지지와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사당패는 봉건통치배들로부터 갖은 천대와 멸시를 받았으나 그들이 남겨놓은 민족예술유산들은 우리 나라 봉건시대 문화발전의 큰 밑천으로 되였다.

사당패는 우선 인민가요와 춤을 발판으로 하였기때문에 그들의 노래와 춤은 활기있고 약동적인것이였으며 민족적감정과 정서에 맞는것이였다. 또한 사당패는 민간에서 보급된 노래와 춤을 전문적인 무대예술의 하나로 발전시키는데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 그것은 사당패성원들의 대부분이 농민출신이였기때문에 농악무와 로동가요의 특성들을 무대예술에 재현할수 있었기때문이였다.

이와 같이 사당패는 그들이 활동하는 전기간에 걸쳐 민족문화와 미풍량속발전에서 여러가지 긍정적역할을 수행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