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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9-29 12:52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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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30세기초부터 B.C. 108년까지 동방의 강국으로 존재한 고조선에는 많은 명장들이 있었다. 성기(?~B.C. 108)도 그들중의 한사람이였다. 그는 외세의 침략으로 나라의 운명이 생사존망의 위기에 처하였던 B.C. 109년과 B.C. 108년 인민들의 항전을 능숙하게 조직지휘하여 침략자들의 간담을 서늘케 하였다. 여러달동안 치렬한 성방어전투가 벌어지고있던 어느날 고조선의 우거왕은 전쟁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중신들을 불러 의견을 물었다. 그런데 누구도 의견을 내놓는 사람이 없었다. 이때 부복하고있던 성기가 무거운 분위기를 깨뜨리며 《성공할지는 모르겠으나 리간책을 써서 그들이 스스로 물러나게 하는것이 어떠하오리까?》라고 자기의 의견을 아뢰였다. 우거왕은 저우기 반색하며 다우쳐물었다. 《어떻게 말이오?》 《지금 서북쪽을 둘러싸고있는 적의 장수는 본래 시중군으로서 이번 출정에서 각별히 자기 나라 임금의 신임을 받아 교만방자한데다가 그가 거느린 병졸들은 몇차례의 전투에서 전공이 있어 포악해진자들이니 이자들은 완강히 견제해야 할것이옵니다. 그러나 남쪽을 둘러싸고있는 적의 장수는 첫 전투에서 병졸들을 수천명씩이나 무주고혼을 만든자이고 지금 그의 부하들은 바다를 건너올 때부터 고생하고 주눅이 들어 별로 싸움을 걸어오지 못하고 <화의>를 맺자고 주장하고있소이다. 하지만 남쪽의 적장은 공명심이 강한지라 공을 평가하는데서 서북쪽적장의 뒤자리에 서라면 서러워할자입니다. 이러한 적들의 허점을 틀어쥐고 두끈을 잘 조절하면 얼마든지 저들끼리 싸우다 물러가게 할수 있소이다.》 그날밤 우거왕은 성기장수를 따로 만나 남쪽에 있는 적장과의 《화의》교섭끈을 어떻게 조절할것인가를 진지하게 토론하였다. 그리고 다음날 남쪽적장에게 사신을 보내여 《화의》를 교섭하게 하였다. 고조선의 사신은 남쪽의 적장을 여러차례 만나면서도 명확한 대답을 주지 않았다. 안달이 난 남쪽적장은 고조선의 《항복》을 받아냈다는 공을 혼자서 독차지할 생각으로 서북쪽적장과의 협동작전을 뒤전에 밀어놓고 고조선에서 삼복철 엿가락같이 질질 끄는 《화의》교섭에만 매달렸다. 한편 서북쪽의 적장은 기약했던 협동작전에 남쪽적장이 나타나지 않는데 화가 나 자기도 사신을 고조선측에 보내여 《항복》을 요구하였다. 그러나 고조선측에서는 《항복》할수 없으며 싸울테면 싸워보자는 배심있는 대답만이 울려나왔고 이것은 서북쪽적장의 화를 더욱 돋구어주었다. 그는 당장이라도 성을 공격하고싶었지만 자기 수하의 병졸들만으로는 싸움에서 승산이 없었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게 된 그는 끝내 자기의 진에 틀어박히고말았다. 결국 적들의 협동작전은 파탄되고 고조선에 대한 공격은 거의 반년나마 하지 못하게 되였다. 적측의 왕은 책임을 따지기 위해 검열관을 현지에 내보냈다. 현지에 도착한 검열관은 서북쪽과 남쪽의 적장들의 허물을 들춰내기 시작했다. 이때 서북쪽적장은 검열관에게 자기가 남쪽적장에게 여러차례 협동작전을 벌릴것을 요구했으나 그가 선선히 응하고는 아예 나타나지 않거나 시간을 지키지 않아 이렇게 되였다고 하였다. 검열관은 남쪽의 적장을 잡아들이고 그의 부대를 다른 적장에게 넘기도록 하였다. 그러자 남쪽적장은 《아이쿠, 간사한 그의 말을 듣지 마오.》하며 변명하였지만 검열관과 그의 부하들은 그를 개취급하듯 하였다. 군사들을 뺏기우고 죽을 날만 기다리는 죄인의 신세가 된 그는 신소편지를 써서 왕에게 몰래 보냈다. 편지를 받아본 왕은 검열관이 일처리를 잘못했다고 하여 검열관을 처형하게 하였다. 이처럼 성기는 적들의 모순을 리용하여 적들사이에 알륵을 조성하고 내부를 혼란시켜 나라의 위기를 가시는데 커다란 기여를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