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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9-27 16:43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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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령도자 김정일동지께서는 다음과 같이 교시하시였다. 《우리 민족은 인류력사발전의 려명기로부터 훌륭한 민족문화를 창조하여왔습니다.》 슬기롭고 문명한 우리 민족은 오래전부터 자기의 체질과 풍습에 맞는 고유한 한증법을 창조하고 발전시켜왔다. 우리 나라에서는 15세기에 이미 한증이 병치료에 널리 리용되였으며 한증에 대한 사람들의 수요도 높았다. 《세종실록》에 의하면 15세기 초엽 조선봉건정부에서는 한증소들에 의원들을 배치하고 병치료를 위해 한증을 하는 사람들속에서 인명사고를 방지하도록 하였으며 얼마후에는 한증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과 수요가 높아지는데 따라 남녀한증탕들을 구분하여 더 짓도록 하였다. 당시 한증칸은 두칸으로 지었는데 한칸은 휴식실로, 한칸은 한증실로 되였다. 한증실은 네벽에 자그마한 틈도 없이 두껍게 매질하고 바닥에 온돌을 깐 밀페된 방이였다. 한증을 할 때에는 아궁에 불을 때서 열을 최대로 올린 다음 아궁을 막고 창포, 도꼬마리, 쑥 등을 온돌우에 깔고 물을 뿌린 후 거기에 앉아 그 증기를 맞으며 땀을 내였다. 몸이 튼튼한 사람은 한식경(한차례의 음식을 먹을만한 시간)을 할수 있었고 몸이 약한 사람은 백까지 셀 정도밖에 못하였으며 허약한 사람은 잠시도 앉아있지 못했다고 한다. 한증을 마치면 휴식실로 나와 소금물로 몸을 씻고 양치질을 한 다음 원기를 보충하기 위해 죽을 마시고 한동안 쉬였다가 다시 한증을 하였는데 하루에 4~5번정도 하였다. 이처럼 우리 민족고유의 난방형식인 온돌을 깐 당시의 밀페식한증탕은 문화위생적으로나 열보존측면에서 가장 우수한 구조를 갖추고있었다. 뿐만아니라 그 방법도 예로부터 소독제로 널리 리용된 소금물로 병균과 함께 온몸에 내배인 땀을 깨끗이 씻고 입안도 세척하는 그야말로 효과적인 병치료방법이였다. 당시 이웃나라에서도 병치료를 목적으로 하는 한증법은 있었으나 그것은 한증탕을 따로 짓지 않고 불을 지펴 땅바닥을 달군 다음 불무지를 쓸어버리고 물을 뿌린 후 여러가지 나무잎과 쌀겨를 깐 우에 돗자리를 편 다음 환자로 하여금 그우에 이불을 쓰고 누워 땀을 내게 하는 방법이였다. 우리 나라의 여러 지역들에서는 온돌식한증탕은 물론 돌로 지은 한증탕도 병치료에 리용하였다. 이 한증탕은 사람이 드나들수 있는 입구만 남겨놓고 돌로 반구형의 구조물을 쌓고 진흙으로 매질하여 만들었다. 한증을 할 때에는 그안에 소나무를 태워 실내를 덥혔는데 시간을 단축하기 위해 지하로 바람길을 설치하여 공기를 쏴주었다. 일정한 온도에 이르면 불을 죽이고 재를 걷어낸 다음 가마니와 멍석을 깔고 물을 뿌린 다음 솔잎을 고루 폈다. 그 다음 사람이 들어가 땀을 내였는데 한증하는 방법은 온돌식한증탕에서 할 때와 같다. 이러한 한증탕에 대해서는 조선봉건왕조시기에 나온 《송천필담》이라는 책에도 실려있다. 우리 나라의 한증법은 멀리 이웃나라들에까지 전파보급되였다. 일본에서는 한증을 《무시부로》라고 하는데 가장 일반적인 《무시부로》인 《가마부로》는 도자기 등을 굽는 로형식으로 지은 한증탕안에 나무를 태워 열을 올린 다음 재를 쓸어내고 소금물을 적신 돗자리를 깔고 거기서 피여오르는 증기를 맞아 땀을 내는 한증법이였다. 그 형태와 방법이 우리 나라와 비슷한 이 《가마부로》는 우리 나라 여러 지역들에 퍼져있던 돌로 지은 한증탕이 전파보급된것이라고 한다. 이처럼 우리 민족의 한증법은 조선사람의 체질적특성과 기호에 맞는 효률적인 병치료방법으로 창조되고 발전하여온 우수한 한증방법이다. 오늘날 한증은 그에 대한 과학연구성과에 기초하여 질병치료를 위한 민간료법으로서만이 아니라 인민들의 건강증진과 장수에도 유익한 문화후생수단의 하나로 광범히 리용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