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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9-06 11:22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8,477   추천 : 0  
조선속담에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다. 그것은 사람의 몸에서 눈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이다. 특히 그림을 그리는 화가에게 있어서 더 말할나위없이 소중하다. 그런데 세상에는 스스로 제눈을 찌른 화가가 있다. 최북(풍경화를 잘 그려 18세기 우리 나라 화단을 장식한 화가의 한 사람)이 바로 그런 사람이다. 최북은 재능있는 화가였으나 경력이 알려진것이 없다. 다만 몇몇 책들에 남아있는 단편적인 기록들과 일화들을 통하여 화가로서의 그의 인품과 재능을 짐작할수 있을뿐이다. 최북은 화초, 새, 짐승, 돌, 나무 등을 자유분방한 필치로 붓을 휘둘러 그리는데도 능하였고 풍자적인 그림도 재간있게 그렸으나 사람들은 산수를 잘 그린다고 하여 그를 최산수라고 불렀다. 어느날 금강산 구룡연에 찾아간 최북은 그 절묘한 경치에 넋을 잃다싶이 하였다. 그는 흥에 겨워 취하도록 술을 마셨다. 볼수록 아름답고 황홀한 자연풍경에 심취된 그의 마음은 즐겁다못해 열광적인 격정으로 뒤번졌다. 울기도 하고 웃기도 하고 부르짖기도 하던 그는 문득 구룡연 바로 가녁에 다가서며 《천하명인 최북이 마땅히 천하명산에서 죽으리다.》 하고 큰소리로 웨쳤다. 그는 막 물에 뛰여들려는 순간에 그 주변사람들의 눈에 띄워 구원되였다. 이처럼 조국의 자연을 끝없이 사랑한 최북은 산수화에 대하여 아는척 하며 조금만 흐지부지하여도 참지 못하였다. 한번은 어떤 사람이 값비싼 비단을 가지고와서 여기에 산수화를 그리되 수려한 산을 감도는 물을 그려달라고 하며 거만하게 행동하였다. 이를 아니꼽게 본 최북은 비단폭에 산만 그리고 물은 그리지 않았다. 그림을 부탁한 사람은 그것을 보고 왜 물은 그리지 않고 산만 그렸는가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허! 그림밖은 모두 물인데…》 하고는 붓을 던지고 일어났다고 한다. 성품이 강직한 그는 아첨하는것을 극도로 증오하였고 그 어떤 경우에도 권세앞에 허리를 굽히지 않았다. 언젠가 정승의 부름을 받게 되였다. 정승은 호화롭게 꾸민 넓은 대청에 그를 불러앉히고 커다란 병풍을 쫙 펴놓으며 병풍에 자기가 좋아하는 신선그림을 그려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최북은 《황송하오나 소인은 신선이 어떻게 생겼는지 보지 못하였으니 신선도를 그릴수 없습니다.》라고 말하였다. 정승은 성이 꼭뒤까지 치밀어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이놈, 내가 그리라면 그릴것이지 어느 령이라고 못하겠다는 소리를 하느냐.》 《소인은 신선을 그릴줄 모릅니다.》 정승은 죽이겠다고 을러메였다. 최북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하얗게 되였다. 그림 그리는 사람을 천한 신분이라고 하여 사람대접도 제대로 하지 않는자들에 대한 쌓이고 맺힌 원한과 분노가 극도에 이른것이였다. 그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붓대를 더듬어잡고 장수가 칼을 뽑아들듯이 눈앞에 번쩍 쳐들었다. 그리고는 그 붓대로 자기의 한쪽 눈을 콱 찔렀다. 피가 흘렀다. 그리고는 또박또박 점을 찍듯이 말하였다. 《나에게 이 눈이 없다면 다시는 신선그림을 그리라고 하지 못할줄로 압니다.》 세도정승도 일이 이렇게까지 될줄은 미처 생각지 못하였다. 그는 방문을 쾅 닫고 나가버렸다. 최북은 자기의 인격과 화가의 량심을 지키는 힘겨운 싸움에서 제눈을 바치는 비싼 대가를 치르고 승리하였다. 사람들은 그후 그를 《애꾸눈 최칠칠》 혹은 《최오수》라고 불렀다. 그는 늘 색안경을 끼고있었는데 그때는 색안경을 《오수경》이라고 하였던것이다. 한눈을 잃은 최북에게는 세상이 몹시 어두웠다. 봉건사회는 이 재능있는 화가의 눈에서 광명을 빼앗은 칠칠야밤과 같은 암흑세상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