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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8-24 11:20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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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사람들은 비단을 고대시기(B.C. 3 000년기초-B.C. 3세기 초 이전)부터 생산하여왔다. 20세기에 들어와 평양시 락랑구역을 중심으로 한 평양일대에서는 2 000년전의 고대비단들이 많이 발굴되였다. 그중에는 석암리205호무덤과 214호무덤 등에서 나온것과 같이 수를 놓은 비단과 색갈고운 실로 문양을 새겨놓은 비단도 있다. 삼국시기에는 5색비단을 비롯하여 비단종류도 10여가지가 되였으며 색과 무늬도 다양하게 발전하였다. 이 시기부터 조선의 비단은 외국에 수출되였다. 고려시기(918년-1392년)에 이르러서는 이웃나라는 물론 중근동에까지 수출되여 《고려비단》이라는 이름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였다. 그것은 이 시기 무늬비단천짜기를 비롯한 비단짜기기술이 발전하여 아름다운 비단들이 생산되였기때문이다. 조선봉건왕조시기(1392년-1910년)에는 전국각지에 이름난 비단생산지가 생겨나게 되였는데 특히 평안도의 녕변, 성천, 함경도의 금야, 정평, 고원, 홍원, 리원, 북청, 단천, 길주, 명천, 강원도의 철원, 황해도의 수안, 전라도의 라주, 경상도의 안동 등지에서 생산된 비단이 유명하였다. 오늘도 평안북도 녕변군에 있는 녕변견직공장은 조선에서 손꼽히는 고급비단천생산지이다. 이 공장의 이름난 비단가운데는 약산단과 구룡단도 있다. 녕변에는 이름난 약산동대가 있고 약산에는 진달래가 많다. 그래서 약산의 진달래꽃무늬를 수놓은 비단은 약산단, 약산동대아래로 흐르는 구룡강의 이름을 따서 흐르는 강물처럼 은근한 무늬가 있는 비단은 구룡단이라고 불리우고있다. 비단이 조선사람들의 생활속에 얼마나 깊이 자리잡고있는가 하는것은 조선을 삼천리금수강산이라고 부르는것만 봐도 알수 있다. 조선은 북남의 최대길이 2 100리에 동서의 최대길이 900리를 합하여 3 000리가 된다. 이 산천이 비단에 수를 놓은듯이 아름답다고 하여 삼천리금수강산이라고 한다. 대동강의 릉라도도 비단과 관련하여 불리워진 이름이다. 대동강물결우에 실실이 휘늘어진 능수버들들이 마치도 구슬같이 맑은 물에 비단필을 풀어놓은것같다 하여 비단천을 가리키는 《릉》자와 《라》자를 써서 예로부터 릉라도라고 불렀다. 묘향산에는 흘러내리는 두줄기폭포수가 비단필을 펴놓은것같은 비단폭포도 있다. 《비단우에 꽃》을 비롯하여 비단의 아름다움을 일컫는 속담도 많이 전해지고있다. 해방(1945. 8. 15.)직후 조선에 견방직공업이 창설됨으로써 민족전통비단생산기술은 더욱 발전하고있다. 현대적인 제사공장들에서 여러 기술공정을 거쳐 비단실(명주실)이 생산되며 이 비단실을 가지고 견직공장들에서 여러가지 비단천들을 생산한다. 한가지 원료를 가지고 가공방법을 달리하여 성질이 서로 다른 다양한 비단을 생산하고있다. 누에고치의 주성분인 피브로인을 둘러싸고있는 교질물질인 세리신성분을 그대로 함유하고있는 상태의 생명주실로 짜는 방법(생비단), 생명주실로 짠 다음 재물에 삶아 세리신을 제거하고 물들이는 방법(숙비단), 생명주실을 재물에 삶아 이긴 다음 물을 들여서 짜는 방법(참비단)으로 짠다. 생비단은 약간 빳빳하고 가볍고 시원하기때문에 여름옷감으로 쓰인다. 숙비단이나 참비단은 우아한 광택을 내며 부드럽고 따스하므로 봄가을과 겨울옷감으로 쓰인다. 오랜 력사와 전통을 가진 비단생산기술은 국가비물질유산으로 등록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