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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7-10 16:08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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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봉건왕조는 고려왕조를 무장정변의 방법으로 뒤집어엎는 과정을 통하여 형성되였다. 이미 오래전부터 고려왕조를 뒤집어엎고 정권을 탈취하려는 야심을 품고있던 리성계는 나라의 거의 모든 군사력이 료동원정에 동원된 기회에 무장정변을 일으킬것을 획책하면서 료동원정을 반대해나섰다. 리성계는 진군을 다그치라는 정부의 지시를 거역하고 장마를 핑게로 시간을 질질 끌다가 마침내 5월말에 위화도에서 매국적인 반란을 일으키고 원정군을 되돌려세웠다. 이것을 력사에서 《위화도회군》이라고 한다. 위화도에서 돌아선 리성계는 반란군을 내몰아 6월초에 개경(개성)을 점령하고 가장 두려워하던 정치적적수인 최영을 귀양보낸 다음 우왕을 내쫓고 9살나는 그의 아들 창을 왕자리에 앉히였다. 다음해인 1389년에는 다시 창왕을 추방하고 고려왕실의 먼 친척인 요라는 사람을 데려다가 왕으로 올려놓았다. 이것이 고려의 마지막왕인 공양왕이였다. 그리고 우왕과 창왕을 고려 왕실의 후예가 아니라 신돈의 아들, 손자라고 하면서 얼마후에는 류배지에서 죽여버렸다. 이와 함께 리성계는 중소지주계층의 리해관계를 대변하는 신진관료들인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일파와 결탁하여 대토지소유자들인 대관료층을 비롯한 반대파들을 이러저러한 구실을 붙여 정계에서 몰아내거나 살해하였다. 리성계일파는 반대파관료들을 잔인하게 탄압하는 한편 왕권탈취를 위한 경제적지반을 마련하기 위하여 사전정리와 과전법을 실시하였다. 리성계일파는 또한 왕권탈취를 위한 야심을 실현하기 위하여 그 발판으로 될수 있는 권력기구도 동시에 준비하여나갔다. 1392년 4월 리성계는 자기 아들 방원을 시켜 왕권탈취음모에 가담할것을 끝까지 거부한 대학자이며 최고위관료였던 수문하시중 정몽주를 선죽교에서 잔인한 방법으로 살해함으로써 반대파세력의 마지막 인물을 제거해버리였다. 이러한 준비사업에 기초하여 리성계는 1392년 7월 12일 드디여 공민왕비 안씨를 강박하여 고려왕조의 마지막왕인 공양왕을 내쫓고 다음날 자기가 《권서고려국사》(략하여 《권지국사》, 림시로 국왕을 대리한다는 뜻)로 되였으며 4일후인 17일에는 도평의사사에 들여앉힌 《혁신파》관리들의 《추대》를 받는 형식으로 왕자리를 탈취하고말았다. 이리하여 474년간 존속한 고려왕조는 끝장나고 조선봉건왕조가 성립되였다. 이때부터 나라이름을 《조선》이라고 하였다. 리성계일파는 왕조교체이후에도 계속 반대파세력들을 탄압하는 한편 자기들의 출로를 큰 나라를 등에 업는데서 찾았다. 마침내 리성계는 사대를 국가의 대외정책의 기본으로 내세우고 그에 의존하여 자기 정권의 대외적안정은 물론 대내적안정도 보장하는 사대굴종정책을 실시하였다. 그러나 개경사람들은 리성계의 배신적인 정권탈취를 반대하는 투쟁을 계속 벌리였다. 고려왕조를 뒤집어엎고 정권을 잡은 봉건통치배들은 저들의 정치적지배권을 실현하기 위하여 봉건통치체제를 재편성하고 강화해나갔다. 15세기 봉건국가는 중앙집권적인 봉건관료통치기구인 토지제도, 군대제도, 신분제도, 법률제도, 경찰제도, 수탈제도 등을 정비강화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 자주성을 위한 인민대중의 투쟁은 계속되여 1467년 함길도농민전쟁이 일어났고 그후 전라도, 황해도지역에서도 큰 규모의 농민폭동이 일어났다. 16세기에 이르러 봉건통치배들사이의 추악한 권력다툼으로 말미암아 봉건통치는 더욱 문란해졌고 전시기에 강대했던 나라의 군사력은 거의 무력한 상태에 빠지게 되여 봉건국가는 점차 약화되기 시작하였다. 이와 같이 어려운 조건에서도 인민들은 임진조국전쟁(1592-1598년)에서 용감히 싸워 일본침략자들을 격퇴하였고 17세기에는 두차례나 걸친 외세의 침략을 반대하여 싸웠다. 17세기이후 일련의 사회경제적변화, 통치배들의 탐욕의 증대와 봉건통치질서의 문란 등으로 봉건적억압착취는 날을 따라 더욱 강화되였으며 이를 반대하여 평안도농민전쟁(1811-1812년), 진주농민폭동(1862년) 등 인민들의 투쟁이 줄기차게 일어나 봉건통치배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주었다. 봉건통치의 위기는 세도정치와 카톨릭교의 침투 등으로 말미암아 더욱 격화되였으며 2 000여년동안 계속된 조선의 봉건제도는 붕괴기에 직면하게 되였다. 19세기 중엽에 이르러 자본주의적관계가 봉건제도를 무너뜨릴 새로운 힘으로 자라났으며 전국을 휩쓴 농민봉기는 봉건국가의 밑뿌리를 뒤흔들어놓았다. 이러한 시기에 자본주의침략자들이 본격적으로 우리 나라에 쳐들어오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애국적인민들은 1866년에 미국침략선 《셔먼》호와 프랑스침략함대를 격퇴하였고 1868년에는 미국침략선 《쉐난도아》호와 《챠이나》호를 격퇴하였으며 1871년에는 미국함대의 침입을 분쇄하였다. 조선인민의 반침략반봉건투쟁은 일본침략자들이 1875년 《운양》호사건을 도발한 다음 1876년 굴욕적인《강화도조약》이 강압체결되고 나라가 점차 반식민지로 굴러떨어지기 시작되면서부터 더욱 강화되였다. 그리하여 1882년에 대규모적인 군인폭동(임오군인폭동)이 일어났고 1884년에는 나라의 근대화를 지향한 부르죠아개혁(갑신정변)이 일어났으며 1894년에는 대규모농민전쟁(갑오농민전쟁)이 일어났다. 이 농민전쟁의 압력에 의하여 봉건정부는 1894년에 부르죠아개혁(갑오개혁)을 시도하였으나 일본침략자들의 방해책동으로 실패하였다. 일제는 1905년 《을사5조약》을 날조하여 조선을 제놈들의 식민지로 만들었으며 1907년에는 《정미7조약》을 날조하고 조선봉건군대해산을 강요하였다. 조선인민은 반일의병운동, 국채보상운동, 애국문화운동 등 각종형태의 반침략반봉건투쟁을 세차게 벌리였으나 나라와 민족을 일제의 마수로부터 건져내지는 못하였다. 1910년 8월 일제침략자들에 의한 《한일합병조약》의 날조로 우리 인민은 식민지노예의 운명을 강요당하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