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8 星期四
첫페지 | 총련합회활동 | 잡지 | 혁명령도업적 | 민족의 숙원 통일 | 심양모란예술학교 | 공보
사이트 내 전체검색
작성일 : 18-07-09 14:51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8,345   추천 : 0  
홍경래는 룡강의 농민가정에서 출생하여 어려서 중화서당에서 공부를 시작하였으며 자라면서 무술훈련과 병서공부에도 힘썼다. 1798년 한양에 가서 과거시험을 보았으나 평안도출신인탓으로 하여 합격하지 못하였다. 그후 과거를 단념하고 10여년동안 전국각지를 돌아다니면서 국내형편을 료해하는 한편 뜻을 같이 할 동료규합에 힘썼다. 1800년 가산의 청룡사에서 태천출신의 모사 우군측을, 그다음해에는 가산지방의 역졸출신이며 부호인 리희저 등을 만나 봉건통치배들을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키기로 약속하였다. 그는 특히 평안도와 황해도 각 군현의 아전들과 상인들, 제고장을 떠난 농민들을 많이 규합하여 폭동력량을 꾸려나갔다. 폭동준비는 1808년경부터 더욱 적극화되였다. 그는 가산 다복동에 본거지를 두고 폭동군의 지휘관들을 양성하였으며 금광을 경영하여 자금을 준비하고 상업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 련락임무를 주었다. 그는 총사령격인 평서대원수가 되고 김사용을 부원수로, 우군측을 선생(참모)으로, 리희저를 도총(후방사령)으로 임명하였으며 농민군을 남진군과 북상군의 두개 부대로 편성하고 우군측, 홍총각, 김창시, 리제초 등을 그 지휘자로 임명하였다. 만단의 준비를 끝낸 그는 1811년 12월 18일 드디여 폭동을 일으켰다. 그의 부대는 며칠사이에 평안도 청천강이북의 많은 지역을 차지하였다. 송림에서 벌린 정부군과의 첫 전투에서 패전한 후 방어에로 이전하여 정주성에서 다음해 4월까지 정부군에 맞서 용감히 싸우다가 최후결전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