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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9.23 星期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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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7-09 14:49
《아리랑》과 라운규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29  

라운규(1901년-1937년)는 1920년대에 활동한 영화연출가, 배우이며 영화문학작가이다.
함경북도 회령군(당시) 회령읍 의사의 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소년시절부터 문예작품을 탐독하였으며 연극써클에도 적극 참가하였다. 그는 1919년에 3. 1운동에 참가하였으며 그후 1년남짓한 기간 머슴살이를 하고 북만일대와 연해주지방을 류랑하였다. 1920년대에 조국으로 돌아왔으나 일제경찰에 체포되여 1년반동안 감옥생활을 하였다. 감옥생활은 라운규의 사상적각성을 더욱 촉진시켰으며 그는 비로소 모순에 찬 당대 현실을 맞받아나가려고 마음먹었다. 이때에 그의 대표작인 《아리랑》이 구상되였다.
감옥에서 나온 그는 신극단 《예림회》에 들어가 북간도일대로 순회공연도 하였다. 부산에서 《조선키네마》에 들어간 때부터 그의 영화창작활동이 시작되였다. 영화예술에 대한 포부가 컸던 그는 독자적으로 영화를 만들 결심을 품고 예술영화 《아리랑》을 만들었다. 그는 이 영화의 영화문학뿐아니라 연출도 하고 주역도 맡아 수행하였다.
예술영화 《아리랑》은 반일감정이 높고 민족적색채가 짙은 영화의 하나이다. 또한 그는 영화문학뿐아니라 연출도 하고 배역도 맡아 수행하면서 예술영화 《풍운아》, 《잘 있거라》, 《벙어리 삼룡이》 등을 련이어 내놓았다. 1930년대에 그는 연극 《철도공부의 죽음》을 비롯하여 예술영화 《홍염》, 《리순신장군》 등과 같은 비교적 경향성이 좋은 작품들도 창작하였으나 《아리랑후편》, 《아리랑3편》 등과 같이 그의 초기작품인 《아리랑》에 비하여 사상예술적으로 뒤떨어진 작품들도 만들었다.
그는 예술영화 《아리랑》을 개작하면서 록음장치도입에 성공함으로써 무성영화를 발성영화로 전환시키는데 기여하는 등 우리 나라 영화예술발전에 이바지하였다.
10여년의 짧은 창작기간에 그는 18편의 영화문학을 창작하고 20여편의 영화를 연출하였으며 25편의 영화에 주역으로 출연하였다. 그의 작품들에는 모순에 찬 당대 사회의 암담한 현실과 일제의 군사적통치에 대한 조선인민의 증오와 항거의 정신 그리고 새로운 미래에 대한 지향이 반영되여있다.
라운규는 우리 나라 민족예술영화의 창시자의 한사람으로서 영화문학작가, 연출가, 배우로서의 뛰여난 자질을 보여준 진보적영화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