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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7-04 16:03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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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류리왕때에 있은 일이다. 수도를 국내성으로 옮긴 뒤에 옛 수도에 남아있던 왕의 아들 해명이 군사들을 훈련시키고있던 어느날 사신으로부터 왕이 보내는 지시문과 칼 한자루를 받았다. 지시문을 뜯어보던 해명의 얼굴은 금시 까매졌고 부하장수들도 놀라와 굳어졌다. 지시문에는 이웃나라와 화목을 도모하여 나라와 백성을 편안케 하려는 부왕의 뜻을 어기였으니 신하된 본분에 앞서 자식된 도리로도 마땅히 죽어야 한다면서 보내는 칼로 즉시 자결하라는것이였다. 왕이 자기 자식을 죽이다니, 정녕 왕자에게 죽을만 한 죄가 있으면 마땅히 죽어야 하겠지만 하물며 왕의 뒤를 이을 태자로 책봉된 해명에게는 그럴만 한 죄가 없지 않은가. 부하장수들은 해명의 손에 쥐여져있는 칼을 빼앗아내면서 절대로 자결해서는 안된다고 막았다. 사신에게는 이웃나라와의 화목을 깨쳤다는 사연의 전후연고를 까밝히여 대왕이 내린 지시를 취소하도록 해야 한다고 완강히 주장하였다. 해명이 이웃나라와의 화목을 도모하려는 왕의 뜻을 깨뜨렸다는것은 1년전 10월에 있은 일이였다. 이웃나라인 황룡국왕이 자기 나라에서 새로 만들었다는 센 활을 해명에게 보내여왔다. 이것을 받은 해명의 마음은 좋지 않았다. 그것은 《너희들이 아무리 옛 수도에 남아 군력을 다지고있지만 새로운 무기를 갖추어나가는 황룡국에 대하여 어쩔 생각을 말아라.》하는 뜻으로 여겨졌기때문이였다. 이리하여 해명은 황룡국왕의 사신앞에서 활을 힘껏 당기여 꺾어버렸다. 사신은 모욕감으로 금시 얼굴이 뜨거워졌으나 내색을 하지 않고 《아니 소문대로 왕자님의 힘이 대단하십니다.》라고 말할뿐이였다. 해명은 꺾어진 활을 뜨락에 던지고 손을 털면서 대답하였다. 《나의 힘이 대단한것이 아니라 활이 변변치 못하구려. 그런 활을 어디에 쓰겠소.》 황룡국의 사신은 돌아가 이 사실을 자기 왕에게 보고하였다. 면박을 받은 황룡국의 왕은 분을 누르지 못해하다가 보복으로 국내성에 있는 고구려 류리왕에게 편지를 보내였다. 그는 편지에서 자기 《선물》에 대한 왕자 해명의 불손한 태도에 대하여 고발하면서 그가 두 나라사이에 불화를 가져오려고 군사를 키우고있을뿐아니라 참을수 없는 모략도 꾸미고있다는 등으로 온갖 거짓말을 다했던것이다. 이 편지를 받고 노발대발한 류리왕이 즉석에서 해명에게 자결하라는 지시문과 칼을 보냈던것이다. 해명의 부하들은 당시 해명이 나라의 존엄을 지켜 취한 행동의 정당성과 황룡국의 모해의 허위성을 가지고 사신에게 이야기하니 사신도 감동되여 다시 왕에게 사실을 밝히고 이미 내린 지시를 취소하도록 하겠다고 하였다. 사신은 해명더러 군막에서 기다리게 하고는 왕에게 올리는 글을 썼다. 이튿날 아침 사신이 글을 가지고 떠나려할 때 해명이 그의 앞을 막아나섰다. 《사신은 이미 내가 죽어야 한다는 대왕의 지시를 받고 나왔던 길이니 돌아갈 때에는 죽었다는 보고밖에 가지고갈것이 없습니다. 이제 사신이 왕의 지시를 취소해달라는 글을 가지고 간다면 그것이 나라의 기강에 끼치는 해가 내 한몸 죽는것보다 몇백배 더 클것입니다.》 하고는 이미 창을 꽂아놓은 곳으로 말을 몰아 질풍처럼 달리다가 몸을 던져 자결하였다. 왕궁으로 돌아간 사신은 류리왕에게 전후사연을 보고하기 전에 해명의 부하들이 썼던 글을 먼저 내놓았다. 글을 읽고난 왕은 그제서야 머리를 끄덕이였다. 《내가 미처 아들의 립장을 알아보지 못하고 이웃나라의 말만 믿고서 내린 지시였으니 이들의 제의대로 이미 내린 지시를 취소하도록 하라. 그러되 앞으로는 다른 오해가 생기지 않게 매사를 알리도록 하라고 아들에게 단단히 일러주어라.》라고 하였다. 그제서야 사신은 땅을 치며 통곡했다. 《왕태자께서는 벌써 자결하셨나이다.》 《뭐라구?》 왕은 놀라서 일어섰다. 《이런 글을 올리는것을 그가 몰랐느냐?》 《알았나이다. 하지만 왕의 지시를 다시 취소하는데서 오는 손실은 나라의 기강을 위해 자기의 죽음보다 몇백배 더 크다 하시였나이다. 그리고 대왕의 자결하라는 지시에는 자결했다는 보고만이 있을수 있다면서 땅우에 박아놓은 창우에 몸을 던져 목숨을 끊으셨나이다.》 왕은 그만 그자리에 풀썩 주저앉고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