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08.09 星期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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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7-04 10:27
부여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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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여는 B.C. 15세기에 고조선(전조선)에서 분립하여 세워진 우리 나라 고대국가들중의 하나이다.
부여의 령역은 서변은 서료하중류지역으로부터 북쪽으로 대흥안령산줄기를 따라 눈강중류에 이르는 계선으로, 동변은 목단강하류계선으로, 북변은 눈강중류로부터 동류송화강중류에 이르는 계선으로, 남변은 휘발하상류와 두도상류지역을 거쳐 동남쪽으로 두만강류역에 이르는 계선이였다.
부여는 당시로서는 발전된 통치기구를 갖추고있었다. 최고통치자는 왕이였고 그 밑에 최고관료인 상이 있었으며 중앙관직으로서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 6가와 대사자, 사자 등이 있었으며 이러한 여러 가들이 모여 국가사업을 토의하는 제가평의회가 있었다.
부여는 전국을 5개 지역으로 나누어 지방을 통치하였으며 말단단위로 읍락을 두었다.
부여에는 비교적 정연한 군사제도가 세워져있었으며 노예제적질서를 유지공고화하기 위한 가혹한 법률이 있었다. 부여의 법에 의하면 살인자는 사형에 처했고 그 가족은 노예로 만들었으며 《도적질》을 한자는 12배의 값을 물어야 하였다. 노예소유자국가였던 부여에서 사회관계의 기본을 이룬것은 착취계급인 노예주와 피착취계급인 노예사이의 적대적대립과 투쟁이였다.
근면한 부여사람들은 다양한 지리적조건들을 잘 리용하여 농업, 목축업, 수공업, 광업 등 생산의 여러 부문들을 발전시켰다. 이 지역에서는 유리한 자연지리적조건으로 하여 오곡이 잘 되고 농업생산량이 늘어났으며 특히 일찍부터 발전된 고조선의 영향을 받아 비파형단검과 좁은놋단검을 비롯한 청동야금업, 제철기술이 상당히 높은 수준에 이르렀다.
B.C. 3세기에 이르러 부여는 노예제도를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과 봉건적생산관계의 확립 등으로 붕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였다. 새로 세워진 봉건국가 고구려와의 관계에서도 점차 수세에 빠지게 되였다.
그러한 가운데 B.C. 219년에 부여남쪽 진펄지대에서 두 나라사이의 큰 싸움이 벌어지게 되였는데 부여왕 대소가 이 전쟁에서 죽음으로써 고대 부여국의 통치층안에서는 분렬이 일어나 종말을 고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