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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8-06-27 15:57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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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력정초는 한해의 첫 시기로서 새해농사를 준비하는 중요한 시기이다. 그러므로 이 시기에는 많은 명절들과 행사들이 있었다. 그가운데서 크게 일러온것은 설명절과 정월대보름명절이였다. 설맞이는 묵은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는 명절이였다. 그러므로 사람마다 새로운 기분과 기대를 가지고 명절을 맞았다. 우리 나라에서는 예로부터 설맞이를 위하여 집안팎을 깨끗이 거두고 특별한 설음식(세찬이라고 하였다)과 새 옷(설빔, 세장이라고 하였다)을 마련하는 풍습이 있었다. 이러한 준비는 대체로 음력 섣달그믐께 즉 12월말부터 하였다. 집안과 집두리를 손질하고 묵은 먼지를 털어내는 풍습은 예로부터 우리 인민이 깨끗하게 살기를 좋아한데서 나온것이였다. 또한 설날에는 여러가지 의식을 진행하였다. 고구려에서는 해마다 정초가 되면 패수가에 모여서 돌팔매놀이와 같은 편싸움놀이를 진행하였으며 백제에서는 왕이 큰 소매가 달린 자주빛 겉옷인 《대수자포》라는 화려한 옷차림으로 축하를 받고 정사를 처리하였다. 금관가야에서는 해마다 설이 되면 술, 떡, 밥, 다과 등 제물을 마련하여가지고 시조인 김수로의 사당에 제사를 지냈다고 한다. 그후 봉건말기까지 우리 나라에서 진행되여온 설맞이의식은 다음과 같은것들이였다. 설날에는 무엇보다도 웃사람들에게 례의를 차리는것이 첫 자리를 차지하였다. 먼저 돌아간 조상에 대한 제사 즉 차례를 지냈으며 다음은 살아있는 웃사람들에게 세배를 하였다. 친구들사이에는 새해를 축하하는 의미에서 좋은 말(덕담)을 주고받았다. 차례는 집안의 살림과 자손의 흥망이 조상을 어떻게 위하는가에 따라 좌우된다고 생각한 조상숭배사상에서 나온 유교적인 행사였다. 세배풍습은 우리 인민이 웃사람을 존경하고 례의를 귀중히 여겨온데서 생겨난 풍습이다. 그러므로 설날이 되면 우선 집안의 웃사람에게 차례차례 큰절로 세배를 드렸으며 다음에는 마을안의 웃어른들에게 세배하러 다녔다. 세배와 음식대접이 끝나면 여러가지 민속놀이를 하였는데 흔히 설날에는 윷놀이와 널뛰기가 흥을 돋구었다. 이 놀이들은 우리 인민이 예로부터 즐겨온것으로서 정서적이면서도 건강에 유익한것들이였다. 정월대보름명절은 보통 14일부터 시작되였는데 14일은 작은보름이라고 하고 15일은 큰보름이라고 하였다. 작은보름에는 수수대껍질과 그 속대로 만든 《화적》이라는 오곡《낟가리》를 세웠다. 이것은 농민들이 풍년을 바라는 마음에서 진행한 하나의 의식 즉 놀이였다. 큰보름날의 행사는 달맞이와 쥐불놀이였다. 큰보름날에는 동리사람들이 모두 마을주변의 산에 올라가 솟아오르는 달을 구경하였는데 이때 누가 먼저 달을 보았는가에 따라 그해의 행운을 말하기도 하고 농사의 흉풍을 예언하기도 하였다. 이것은 허황한것이나 여기에는 새해농사가 잘되기를 바라는 농민들의 소박한 념원이 깃들어있다. 쥐불놀이는 홰불을 켜들고 들판에 나가 묵은 잔디를 태워버리는것이였다. 이것은 농사에 해를 끼치는 벌레를 태워죽이는데 유익한 놀이였다. 밤고장에서는 밤나무밑의 잔디를 태우고 장대로 밤나무가지를 두드리면서 즐거운 놀이를 하였다. 이것도 역시 밤나무에 달려드는 벌레를 태워죽이고 묵은 가지를 두드려 꺾어버림으로써 새 가지들이 자라나 밤알이 많이 달리도록 하려는 유익한 놀이였다. 큰보름날에는 철음식으로 약밥을, 작은보름날에는 《명길이국수》를 먹었다. 정월대보름명절에는 연띄우기, 바람개비놀이, 줄당기기, 놋다리놀이, 다리밟이, 수레싸움놀이로 하루를 즐기였다. 보름명절에 어린이들의 흥미를 제일 많이 끈것은 연띄우기였다. 이러한 놀이들은 전국각지에 다 있었으나 놋다리놀이는 경상도 안동지방에서, 다리밟이는 큰 도시에서, 수레싸움놀이는 강원도 춘천지방에서 많이 하였다. 이밖에 정초명절에는 24절기의 하나인 립춘맞이도 있었다. 립춘날에는 집안팎을 깨끗이 손질하면서 립춘첩이라는 새봄을 축하하는 글을 대문과 허청간 문같은데 써붙이였다. 정초의 민속명절행사에서 례의도덕을 귀중히 여기고 주위환경을 깨끗이 거두며 음식을 알맞춤하게 마련하여 먹은것은 명절을 즐겁게 맞는데서 좋은것이였다. 그러나 정월보름날의 달맞이를 통하여 그 해의 《행복》을 점치거나 《화적》을 세워 그해의 풍년을 비는것 등 미신행위를 벌린것들은 모두 당시의 농민들이 과학지식이 부족하였기때문에 그 어떤 《신》의 힘을 빌어 자연재해를 면하고 《행복》을 이룩하려는데서부터 나온 허황한것들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