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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6-03-21 08:26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4,203   추천 : 0  

세계적인 유전학자, 잠업자라고 하면 누구나 다 계응상박사를 생각한다.

계응상박사는 오늘도 세계유전학계가 공인하는 과학자로 조국과 인민의 기억속에 살아있다.

1893년 12월 27일 평안북도 정주시 석산리 빈농가의 가정에서 태여난 그는 배움의 열망을 안고 서울보성중학교를 졸업한 후 정주오산중학교에서 교원으로 있었다.

그후 서울과 일본에서 가정교사로 생계를 유지하면서 친우들의 도움으로 공부를 하였다. 일본 규슈제국대학을 졸업한 그는 대학원 연구생으로 누에유전학, 생리학 및 해부학부문에 대한 5편의 론문을 발표한데 이어 중국 광동성 광주시 중산대학 농학교수로 있으면서 10여종의 우량한 누에품종을 육성하고 8건의 론문을 발표하였다.

그후 윁남의 하노이와 하이풍, 홍콩과 일본의 고베, 경기도에서 과학연구사업을 하려고 하였으나 식민지민족의 지식인로서 나라없는 과학자의 설음을 눈물로 씻어야만 하였다.

조국이 해방된 후에야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품에 안기여 비로소 재생의 길을 걷게 된 계응상박사는 김일성종합대학에서 후대교육과 과학연구사업에 전심전력할수 있게 되였다.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주체35(1946)년 10월 그를 친히 만나주시고 주체의 과학적신념을 심어주시고 과학자로서의 한생을 빛내여나가도록 따뜻이 손잡아 이끌어주시였다.

위대한 수령님의 크나큰 사랑과 믿음이 자양분이 되여 그는 당시 생물학발전과 농업생산실천에 저애를 주고있던 《혼합유전설》과 《환경유전설》을 반대배격하고 유전자설을 옹호고수함으로써 유전학과 생물학을 발전시키는데 크게 기여하였다.

풀색고치는 4쌍의 같은뜻유전자에 의하여 규정되며 살색고치는 6쌍의 같은뜻유전자에 의하여 얻어진다는것을 증명한 그의 연구성과는 유전자외의 그 어떤 요인에 의한 《혼합유전》이란 있을수 없으며 아무리 복잡한 유전현상도 기능이 서로 다른 여러가지 유전자들에 의하여 규정된다는것을 과학적으로 론증하였다. 이것은 일부 학자들이 유전자설을 반대하는데 적용해온 《혼합유전설》의 부당성을 론증한 새로운 과학적발견이였다.

계응상박사는 그후 유전자가 염색체에 자리잡고있는것을 련관유전현상으로 확인하고 누에의 제7염색체, 제12염색체, 제15염색체의 염색체지도를 처음으로 만들었으며 뽕누에의 다른 염색체지도를 보충하였다.

그후 여러가지 뽕누에품종을 비롯한 가둑누에품종 《가둑누에 54》호와 《가둑누에 64》호를 육성하였으며 피마주누에 원유종을 출발재료로 야생하는 가중나무누에를 섞붙임하여 온대지방에서 겨울을 나는 피마주누에품종을 세계에서 처음으로 육성하였다.

그의 과학연구성과는 세계유전학계를 깜짝 놀래웠다. 그는 자신의 과학연구성과와 생산실천적경험들을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여 많은 론문들과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가둑누에 및 피마주누에고치생산기술을 체계화한 도서 《작잠학》(1954년), 《피마잠》(1958년)을 비롯하여 누에해부, 누에유전, 누에육종, 누에치기와 관련한 많은 과학기술도서들을 집필하였다.

위대한 당의 품속에서 그는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원사, 교수, 박사로 세계유전학계의 권위있는 과학자로 성장하였다.

주체52(1963))년 12월 농업과학원을 찾으신 위대한 수령님께서는 후대교육사업과 유전학연구에서 이룩한 그의 과학연구성과를 높이 평가하시여 우리 나라에서 처음으로 되는 3권으로 된 《계응상선집》(1963-1973)을 편찬발행하도록 하신데 이어 로력영웅으로, 인민상계관인으로 내세워주시였으며 그가 세상을 떠난 후에는 그의 묘를 애국렬사릉에 안치하도록 하는 대해같은 은정을 베풀어주시였다.

세계적인 유전학자인 계응상박사, 그는 오늘 영생의 언덕에서 이렇게 속삭이고있다.

- 당의 품은 위대한 삶의 품, 영원한 태양의 젖줄기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