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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감찬은 고려시기 나라를 수호하는데 크게 기여한
그는 삼한벽상공신칭호를 받은 강궁진의 아들로 경기도 시흥에서 태여났다.
983년에 과거에 합격하여 벼슬은 례부시랑, 한림학사, 리부상서 등을 거쳐 고려봉건정부의
1010년 11월에 침략자들이 40만대군을 끌고 제2차로 고려를 침입하여 왔을때 통주(동림)에서 고려의 방어군이 강조의 잘못으로 패하게 되자 적들은 일시 기세를 올리면서 수도 개경(개성)으로 달려들었다. 이때 일부 비겁한 봉건관료들은 적들에게 항복하자는 의견까지 들고나왔다. 강감찬은 개경을 일시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항전을 계속할것을 주장하였다. 강감찬의 주장에
적들은 일시 개경을 점령하였으나 고려인민들의 용감한 투쟁으로 개경에 기여든지 10일만인 1011년 1월 11일에 쫓겨가기 시작하였다. 때를 기다리고있던 고려군대와 인민들은 도망치는 적들에게 무리죽음을 안기였으며 침략자들을 쳐물리치는데서 강감찬의 역할은 대단히 컸다.
강감찬은 그후 서북면행영도통사가 되여 서북지방의 방어를 맡았다. 침략자들의 기도를 미리 알아차린 고려는 강감찬을
1018년 12월에 10만의 침략군이 제3차로 고려에 침입해왔다. 첫 싸움은 압록강의 흥화진계선에서 벌어졌다. 이때 강감찬은 미리 소가죽으로 막아두었던 흥화진동쪽의 강뚝을 터뜨려 적들에게 물벼락을 들씌워 전투서렬을 혼란시키고 그 주변에 매복시켰던 기병 1만 2 000명이 돌격하도록 함으로써 적들에게 큰 타격을 주었다.
적들은 첫 전투에서 치명적인 손실을 보았으나 본래의 계획대로 최대한 도중전투를 피하면서 개경으로 달려들었다. 강감찬은 적들의 모험전술에 대처하여 새로운 작전을 폈다. 그는
침략전쟁은 이처럼 고려인민의 용감한 투쟁에 의하여 승리로 끝났으며 이 싸움에서 강감찬은 고려인민과 고려군대를 전투승리에로 이끄는데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