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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5-12-10 14:41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3,882   추천 : 0  

허죽산은 주체13(1924)년 8월 25일 중국 길림성 룡정시의 한 빈농가의 가정에서 4형제의 막내아들로 태여났다.

일제에게 나라를 빼앗긴 망국노의 설음을 안은 그의 부모들은 조상의 뼈가 묻힌 고향인 함경북도의 길주땅을 떠나 산설고 물설은 이국땅에 자리를 잡게 되였다.

째지게 가난한 살림이였지만 그의 부모들은 막내자식만은 어떻게 하나 공부를 시켜보려고 궂은일, 마른일 가리지 않았다.

하여 그는 8살나는 해에 소학교에 다니게 되였다.

체육시간은 그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였는데 그는 100m달리기에서 언제나 1등을 하였고 철봉, 평행봉운동도 잘하였다.

그러던 어느 일요일 동무들과 룡정시내에 구경을 나갔던 그는 한 건물의 울타리옆을 지나다가 안에서 튀여나오는 축구공을 보게 되였다.

왜놈아이들이 마당에서 축구를 하고있었던것이였다.

난생처음 보는 고무축구공을 두손으로 잡고 얼떠름해 서있는 그에게 왜놈아이들이 소리쳤다.

《야, 촌뜨기센진새끼! 공도 찰줄 모르는 주제에 뭘 멍하니 있어. 빨리 공을 보내라.》

참을수 없는 모욕감에 얼굴이 붉어진 그는 그날 집에 돌아와서도 계속 공에 대하여서만 생각하였다. 체육을 잘하는 자기가 공을 찰줄 몰라 왜놈새끼들에게 멸시를 받았다고 생각하니 피가 끓어올랐다. 어린 아들이 잠 못드는것을 보고 부모들이 리유를 묻자 그는 웨치다싶이 말했다.

《난 축구를 하고싶어요!》

그때부터 그는 축구의 세계에 뛰여들게 되였다.

그는 하루공부를 끝마치면 운동장에서 밤늦도록 공을 찼다.

공이라야 새끼오리를 둥글게 꼬아 만든것이였지만 그것은 허죽산에게 있어서 유일한 기쁨이고 희망이였다.

그의 축구기술은 눈에 띄게 발전했고 어느덧 그에게는 《축구에 미친 소년》이라는 별명까지 붙게 되였다.

그의 축구기술이 하도 뛰여난 덕분에 당시 그가 속한 중학교의 축구팀은 다른 중학교들과의 대항경기에서 련승을 기록했으며 그의 이름은 만주땅은 물론 국내에까지 알려지게 되였다.

왜놈들은 그의 축구기술을 《야마도다마시》를 고취하는데 리용할 흉심을 품고 그에게 일본으로 가서 선수생활을 할것을 강요하였다.

그때 그는 자기를 찾아온 왜놈감독을 쏘아보며 소리쳤다.

《내 어찌 조선사람으로서 일본의 선수로 되겠는가. 썩 사라지라!》

허죽산을 회유할수 없다는것을 알게 된 일제는 그에게 《불온분자》의 딱지를 붙여 징용에 끌어가려고 하였다.

징용장을 갈가리 찢어버린 그는 일제를 쳐부시는 항일유격대를 찾아갈 결심을 하고 집을 나섰다.

그러나 그는 얼마 안있어 중국 길림성의 한 마을에서 가슴이 터질듯 한 조국해방의 기쁨을 맞이하게 되였다.

 

특기동작은 휘돌려차기

 

허죽산은 청진방적공장(당시) 공무직장에서 일하면서 우수한 축구선수들을 데려다 축구팀을 뭇고 주체35(1946)년 10월에 평양에서 열리는 전국체육경기대회에 참가하였다.

그런데 뜻밖에도 이 경기대회에 참가한 모든 체육선수들은 해방의 은인이신 절세의 애국자 김일성장군님을 한자리에 모시고 전국체육인대회를 진행하는 영광을 지니게 되였다.

해방된 조선의 체육이 나아갈 앞길을 환히 밝혀주시는 영명하신 김일성장군님의 연설을 자자구구 심장에 새겨안으며 그는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

축구로 해방된 새 조선의 이름을 온 세상에 떨칠 굳은 결심을 품고 그는 축구훈련을 더 맹렬히 하였으며 끝내 자기의 특기동작인 180°휘돌려차기를 훌륭히 완성시켰다.

그는 주체38(1949)년 2월 민족보위성(당시)축구팀의 공격수로 선발되였으며 수많은 국내국제경기들에서 훌륭한 경기모습을 펼쳐보이였다.

이전 쏘련의 군대축구팀과의 축구경기가 진행될 때였다.

상대팀문을 등지고 서있던 그는 우리팀 선수가 길게 보내오는 공이 땅에 떨어지기 전에 자기의 특기동작인 왼발로 휘돌려차넣기를 하여 통쾌하게 득점하였다.

경기가 끝난 후 상대팀의 감독은 그를 두고 《허죽산선수의 휘돌려차넣기동작은 유럽의 축구명수들도 하기 힘든 동작이다.》라고 하면서 그의 축구기술에 감탄하였다.

허죽산은 주체38(1949)년 8월 마쟈르에서 진행된 제2차 세계청년학생축전에 우리 나라 축구팀 선수로 참가하여 자기의 특기기술을 온 세상에 남김없이 과시하였다.

기계와 같은 정확한 차넣기와 폭발적인 속도, 완강한 투지로 상대팀 꼴문그물을 련속 흔들어놓은 허죽산은 기계다리로 불리우며 인민들의 사랑을 받았다.

조국해방전쟁시기 허죽산은 수송군관이 되여 자동차와 함께 전쟁의 승리를 위해 밤낮없이 달리고 또 달리였다.

주체39(1950)년 9월, 신고산벌판을 지나 철령고개에 들어선 허죽산의 자동차는 적기들의 맹폭격을 받게 되였다.

경기관총을 손에 잡고 적기들을 향하여 불을 뿜던 허죽산은 원쑤들의 기총탄을 맞고 쓰러져 다시는 일어나지 못하였다.

당시 허죽산의 나이는 26살이였다.

전우들은 그가 승리한 날에 신고 경기장에 다시 나서겠다며 언제나 배낭속에 간수하고있던 한컬레의 축구화를 그와 함께 땅에 묻었다.

그때로부터 40여년세월이 흐른 어느날 위대한 김정일장군님께서는 허죽산에 대하여 회고하시였다.

장군님께서는 그전에 그가 기계다리로 불리웠다고, 지금은 그런 특기를 가진 선수가 없다고 하시면서 허죽산과 같은 특기있는 선수들을 많이 키워낼데 대한 귀중한 가르치심을 주시였다.

흘러가는 세월속에 동시대체육인들과 축구애호가들의 기억속에서까지 사라져가던 기계다리―허죽산은 절세위인의 추억속에 다시 살아나 영원한 축구재사로 력사에 이름을 남기게 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