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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6-28 10:32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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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말기 고종의 왕비로 보통 민비라고도 한다. 9세 때 부모를 잃고 가난하게 살다가. 1866년 부대부인(흥선대원군의 부인)의 추천으로 16세에 왕비가 되었다. 고종의 사랑을 그다지 받지 못했고, 자신이 낳은 첫번째 왕자를 5일만에 잃는 등 어려운 상황이 계속되는 가운데 궁녀 이씨가 낳은 완화군을 세자로 책봉하려 하자 시아버지인 대원군과 대립하여 정치적으로 간섭하기 시작하였다. 1873년 국제 정세가 긴박해지고 경복궁 중건으로 백성들의 불만이 커지는 등 대원군의 실정이 계속되자, 최익현을 동부승지로 임명하고 대원군을 물러나도록 하였다. 그 후 대원군파의 쇄국 정책도 폐하여 일본과 외교를 맺었다. 그러나 1882년 임오군란(구식 군대의 군인들이 신식 군대인 별기군과의 차별 대우와 밀린 급료에 불만을 품고 일으킨 병란)이 일어나자 대원군이 다시 정권을 잡았다. 이렇듯 대원군과 정치적인 주도권을 잡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이는 와중에 청나라·일본·러시아 등의 외국 세력을 끌어들였으며, 또한 자신의 집안 사람들을 앞세워 민씨 일파의 세도 정치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895년에 일어난 을미사변(일본의 자객들이 경복궁을 침입하여 당시 러시아세력과 친밀했던 민비를 죽인 사건) 때 일본인에게 살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