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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0-06-30 08:53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10,111   추천 : 0  
우리나라에 천주교가 처음 알려진 것은 임진왜란 때라고 한다. 독실한 천주교 신자였던 왜장 고니시가 대부분 신자인 자신의 군사들을 위해 세스페데스라는 종군신부를 대동하고 조선 원정의 길에 나섰던 것이다. 하지만 세스페데스는 철두철미 침략자의 편에 서서 조선 민중을 바라보았다.


정묘호란 후 청나라에 인질로 끌려간 소현세자가 북경에 와 있던 신부 아담 샬과 친분을 맺고 천주교와 서양 의 과학기술을 배운 것이 두 번째 만남이다. 새로운 서양문물을 가져온 소현세자는 아버지 인조와 노론들에게 미움을 샀고, 그러다가 귀국한 지 두 달 남짓해서 의문의 죽음을 맞고 말았다.





2. 초기 천주교 박해와 그 원인



천주교는 계속 보급되어 영조 때는 해서·관동지방에 널리 퍼졌다. 제사는 우상숭배라 하여 제사를 없애는 사람도 생겨났다. 조상에 대한 효도를 무엇보다 중시하는 유교의 나라에서 정부가 가만히 있을리가 없었다. 왕은 천주교를 엄금시켰다. 1758년의 일이다 그때 천주교는 서학이란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최초의 박해는 1785년 김범우의 집에서 최초의 세례자였던 이승훈을 비롯한 교회의 지도자들이 종교 모임을 가지고 있을 때 순라꾼들에게 적발됨으로써 일어났다. 체포된 신자들 가운데 중인인 김범우가 잡혀 고문받고 귀양가서 죽으니, 신앙을 위해 죽음을 당한 최초의 순교자가 되었다. 나머지는 양반이라 하여 훈방해 돌려보내고 천주교 전교를 금했다.



그로부터 약 6년 후인 1791년(신해박해) 전라도 진산에 사는 양반 윤지충이 어머니 상을 당해서 위패도 모시지 않고 제사를 지내지 않았다는 사실이 조정에 알려졌다. 윤지충은 정약전의 외종동생이다. 윤지충과 그를 옹호한 사촌 권상연 두 사람은 패륜아요 혹세무민한다는 죄목으로 참형을 당했다. 뿐만 아니라 홍문관에 소장되어 있던 막대한 양의 서양서적들이 불태워지고 민간에서도 서양서적을 갖는 일이 금지되었다.



천주교, 즉 서학은 지배층에게는 체제와 정통에 대한 도전으로 생각되었다.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는 것은 유교윤리의 핵심인 '효'를 부정하는 일이요, 이는 곧 나라의 어버이 왕에 대한 '충'을 부정하는 행위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유교이념으로 유지해온 조선에 대한 부정이요 도전으로 보였다. 그래서 천주교도들은 '나라를 원망 하며 세상을 뒤바꾸고자 하는 무리들'로 규탄 받으며 형장의 이슬로 사라져야 했다.



초기에 천주교를 믿은 사람은 주로 양반, 그 중에서도 당쟁에서 밀려난 남인들이었다. 실학자의 대부분이 이 남인에서 나왔으며, 실학자 중 서학과 서양학문의 영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없다. 천주교가 주로 권좌에 서 밀려난 양반들 사이에서 믿어진 탓에 양반들의 권력다툼이 천주교 탄압으로 표면화된 경우가 많다. 이런 이유로 초기의 천주교는 박해와 탄압을 받았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박해의 원인은,

첫째, 사상적으로 유교사상(충, 신분중시)과 그리스도교 평등 사상의 충돌

둘째, 사회적으로 조선의 전통적인 예절인 조상의 제사(효)를 거부했다는 것

셋째, 정치적으로 당파 싸움의 방편과 서양 세력의 진출에 대한 거부감 등을 들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