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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 13-10-29 12:47
 글쓴이 : 최고관리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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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을 둘러싼 렬강들의 각축전속에 1895년 11월에는 미국에 의한 조선황궁습격사건(춘생문사건)이 일어났다.
황제를 서울주재 미국공사관에 끌어다놓고 친미정권을 세울 흉책을 꾸미고있던 미국은 11월 27일 약 100명의 해병대와 40명의 특공대, 미국인 덴니가 훈련시킨 수백명의 시위대(조선군대)를 사촉하여 황궁습격을 개시하였다.
미국의 음모를 사전에 탐지한 조선정부가 황궁경비를 강화하는 한편 기만과 위협에 못이겨 이에 가담한 시위대를 정부측에 돌려세움으로써 그들의 습격은 파탄되였다.
조선에 대한 침략야욕을 품어온 짜리로씨야도 조선에서 명성황후살인사건과 춘생문사건이후 높아가는 반일, 반미감정을 리용하여 친로정권을 수립하기 위한 음모를 꾸미였다.
조선주재 로씨야공사 웨베르는 인천에 와있던 로씨야해병대무력을 서울에 끌어들이고 그 엄호밑에  음모적방법으로  1896년  2월  11일  밤에  황제와  황태자를  로씨야공사관에 옮겨앉게 하였다.
아관파천으로 불리우는 이 사건후 로씨야는 친로파중심의 《내각》을 조작하고 이 정부를 조종하여 조선에서 여러 지역의 채광권과 산림채벌권을 비롯하여 여러 부문의 리권을 빼앗았으며 정부의 재정권과 군사권을 틀어쥐였다.
이것은 일본의 심리를 크게 자극하였다.
로씨야의 내정간섭을 반대하는 인민들의 투쟁기세와 압력이 높아지자 황제는 1897년 2월 20일 로씨야공사관에서 황궁으로 돌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