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3.29 星期五
첫페지 | 총련합회활동 | 잡지 | 혁명령도업적 | 민족의 숙원 통일 | 심양모란예술학교 | 공보
사이트 내 전체검색
작성일 : 16-05-10 10:16
 글쓴이 : 최고관리자
조회 : 5,154   추천 : 0  

서론

 

 

지금 우리는 지난 수천 년간의 역사과정 속에서 가장 특이한 시기에 살고 있다. 지난 1세기 동안 그중에서도 특히 지난 수십 년 동안 고도의 과학과 산업기술의 혁명으로 생산력이 극도로 발전되었고, 질적으로 우수한 기계류와 생산 도구들이 만들어졌다. 이 시기만큼 인류의 창조력이 발휘된 적이 없었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이 시기에 인류의 문명을 순식간에 잿더미로 만들어버릴 만한 거대한 파괴수단도 동시에 생산되었다. 지금 인류는 원자폭탄과 수소폭탄의 위력 앞에 무기력한 채 공포에 떨며 살고 있다. 특히 남북으로 분단된 코리아반도에서는 언제 핵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위급한 상황이 전개되고 있다. 이러한 위기상황이 바로 우리가 사는 이 시기의 가장 핵심적인 문제이다. 이것은 자본주의 국가들이나 사회주의 국가들이나, 또한 기독교 신봉자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 그리고 주체사상 신봉자들, 불교인들, 회교도들, 흰두교인들 모두가 직면한 위급한 문제이다. 어떤 사회제도를 가졌든, 어떤 사상, 종교, 철학을 가졌든 간에 인류는 모두 이 위기를 극복하는데 일 몫을 다해야 할 것이다. 모든 사회제도, 사상, 종교는 결국 인류에게 봉사하기 위하여 존재할 뿐이다.

 

모든 진보주의 운동이 그렇듯이 사회주의 운동의 본성은 본질적으로 처음부터 모든 변화에 개방적이고 낡은 것을 개혁하는 일에 앞장서 왔다. 사회주의는 그 초기부터 본성적으로 사회정의, 사회변혁을 부르짖어 왔다. 언제나 인류를 파멸로 이끄는 퇴보적이고 폐쇄적인 정책을 써온 것은 자본주의였다. 자본주의는 그 본성적으로 모든 전쟁위협의 원인이 되고 있다. 이와 관련하여 자본주의는 군국주의를 내세워 자본주의 경제체제를 유지하고 발전시켜 왔다. 즉 국제분쟁을 계속 유도하고 전쟁체제를 지속시켜야만 군산복합체를 계속 유동시켜 그들의 <전쟁경제>를 유지할 수 있었다. 그래야만 유지되는 것이 자본주의 경제체제이다.

 

그다음으로, 자본주의 제도가 아직 생존하는 것은 신식민주의 때문이다. 즉 현 자본주의제도는 제삼세계와의 불평등한 무역관계가 없이는 생존할 수 없다. 결론적으로, 자본주의가 과연 핵무기 없는 세계, 새로운 평등한 경제 질서, 악선전이 아닌 정직한 두 제도의 지성적, 도덕적 비교 풍토에 적응할 능력이 있느냐는 점이다. 21세기의 역사의 진로는 바로 자본주의가 이 문제들에 어떻게 응답하느냐에 달려 있다.

 

김일성 주석은 1990년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사회주의에로의 길은 전인미답의 길인 것만큼 전진 도상에서 예상치 않던 사변에 부닥칠 수도 있으며 우여곡절을 겪을 수도 있습니다.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방법도 변천되는 현실에 맞게 끊임없이 개선되고 완성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인류가 반드시 사회주의 길로 나가야 한다는 역사의 진리는 달라질 수 없습니다”

 

김주석이 지적한 것처럼 역사는 진보 발전하는 것이 불변의 법칙이다. 이러한 세계사적 변혁의 견지에서 코리아반도의 문제를 보아야만 제국주의와 사회주의가 가장 첨예하게 대립하고 있는 남북의 제반 문제를 올바로 볼 수 있고, 그 문제 해결을 위한 조심스러운 시도를 해볼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세계사적인 위기와 코리아반도의 대립관계 상황 속에서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주체사상도 연구 검토되어야만 올바른 토론이 가능하다고 본다.

 

 

마르크스주의의 종교관

 

 

그러면 마르크스주의의 종교관에 대하여 알아보자. 마르크스의 스승 부르노 바우어(Bruno Bauer)는 종교를 <인간의식의 환상적이고 왜곡된 창조물>로 보았으며, 종교가 사회의 제 모순을 이상화하는 기능을 하고 있다고 믿었다. 바우어의 영향을 받은 마르크스는 종교의 내용이란 바로 <인간의 비인간화>라고 주장했다. 그러므로 인간은 세상에 대한 그의 환상을 제거하지 않고는 세상을 변화시킬 수 없다고 보고, 마르크스는 헤겔의 [법철학의 비판서론]에서 “종교의 비판은 모든 비판의 전제조건이다.”라고 지적했다.

 

마르크스의 종교비판의 핵심적인 요인은 종교를 <소외의식의 형태>로 특정지어 생각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영향을 준 포이엘바하(Feuerbach)는 그의 저서 [기독교의 핵심]에서 유대교와 기독교의 유신론적 하나님은 다름 아닌 <인간이 갈망하는 인간의 완전성을 상상적으로 투사한 영상>에 불과하다고 지적했다. 따라서 성서에 나오는 하나님 속에 투사된 사랑, 선, 지혜, 창조 등은 바로 인간 자신에 속한 속성들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포이엘바하의 변형방법(transformative method)에 의하면 신학과 관념론에서는 주어와 술어, 독립된 목적물과 의존적 결과 사이의 참된 관계를 전도시켜 생각하고 있다고 본다.

 

예를 들면 “하나님은 사랑이다”라고 신학에서는 말하지만, 변형방법에서는 “사랑이 하나님이다”로 역으로 생각한다. 초기 마르크스는 인간소외를 다루면서 그것을 극복하기 위한 비신비화(demystification)의 방법으로 포이엘바하의 <변형방법>을 사용했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소외>로 본 포이엘바하의 주장에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종교를 <이념>, 즉 <거짓의식>으로 보았다. 여기서 마르크스가 쓰고 있는 <이념(이데올로기)>이란 의미는 어떤 사회의 궁극적인 가치를 나타내는 이데아나 가치체계로서 세계관과 동의어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사회의 지배층이 피지배층을 계속 억압하고 착취하기 위하여 현실을 신비화시키고 속이기 위하여 사용하는 <거짓의식>으로서의 이데아나 가치체계를 나타내는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마르크스의 주장으로는 유기적인 조직체로서 어떤 사회에서나 상호 대립적인 계급이 존재하며 이 계급 간에 상호 이해관계의 충돌이 불가피하다는 것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지배층은 피지배층이 가지게 될 참된 현실 파악과 목표의식을 혼동시키고 신비화시키기 위하여 사용하는 것이 이데올로기, 즉 <거짓의식>이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의 주장에 의하면 종교도 이데올로기로서 인간의 거짓된 의식을 표현하고 있다고 보고 종교가 인간을 인간화시키기보다는 비인간화시킴으로써 인간을 메마르고 비열하게 만들고 있다는 것이다. 마르크스가 자주 이데올로기와 거짓된 의식을 일치시키고 있지만 거짓된 의식을 엄격히 종교의식에만 제한하지는 않았다. 그는 단지 종교가 거짓된 의식의 전형적인 형태라고 보았다. 포이엘바하가 종교의 소외를 지적하고 종교의 순화를 시도한 것이지 결코 파괴를 시도하지 않았지만, 마르크스는 기성 제도화된 종교에 어떤 가치도 두지 않았고 종교가 어떤 적극적인 기능을 하고 있다고 보지도 않았다. 따라서 마르크스는 무신론주의, 즉 종교의 부인을 인간긍정을 위한 준비단계라고 보았다.

 

이때부터 마르크스는 종교적인 소외의 모델을 정치, 경제의 현상에 응용했다. 마르크스는 종교적인 소외가 정치 경제적인 소외를 낳게 하는 것이 아니라, 경제적인 소외가 정치적인 소외를 낳게 하고, 정치적인 소외가 종교적인 소외를 낳게 한다고 보았다. 따라서 마르크스에 의하면 종교란 부대 현상적인 결과이지 실제적인 원인이 아니라는 것이다. 마르크스는 종교를 정치질서의 밑바닥에 존재하는 인간소외의 결과로 보았고 정치보다 근본적이고 역동적인 원인인 <경제 질서 내의 소외의 결과>라고 보았다. 마르크스는 1844년에 쓴 <경제 철학적 사본>에서 자본주의 사회 경제구조 아래서 인간소외가 발생하는 여러 요인을 자세히 설명하고 있다.

 

그에 의하면, 인간이 <생산과정>에서 소외되고, 또한 그가 만들어 낸 <생산품>으로부터 소외되며, 다른 <동료 인간>과도 소외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생산과정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생산과정을 위해 존재하게 되며, 인간이 노동시장의 상품이 되어버리고, 그 결과 인간의 개성은 파괴되고 물건의 종이 되어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자본주의의 경제구조 속에서 파생되는 인간소외는 인간의 모든 가치를 파괴해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근본적인 경제구조 내에서 발생하는 실제적인 인간소외는 전혀 극복할 생각을 하지 않고 단지 부대 현상적인 결과인 종교의 소외만 계속 공격해보았자 근본적인 소외가 해소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한 병증세를 제거했다고 그 질병을 치료한 것이 아니며 그 병인을 제거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폐병 환자가 그의 병 증세인 열이 난다고 하여 해열제나 복용해서는 폐병이 근본적으로 치료되는 것이 아닌 것과 같다는 것이다. 종교란 진정한 문제의 파악과 그 문제의 위험성, 또한 그 문제의 여러 징후를 알아내는 데 중요한 정도로 가치가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징후를 알아내는 것만으로는 병 치료에 효과를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왜냐면 병의 치료는 이론으로서가 아니라 실제적인 방법으로 다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알투서(Althusser)는 그의 저서 [마르크스를 위하여]의 3페이지에서 예리하게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거꾸로 된 한 목적물을 똑바로 서게 돌려놓았다고 해서 그 본성이나 내용이 변하는 것은 아니다. 물구나무선 사람이 다시 바로 서서 제 발로 걷고 있다고 해서 그 사람이 다른 사람으로 변하는 것은 아니다.”

 

마르크스는 의식은 의식 내에서만 변할 수 없으며 단지 구체적인 행위의 변화에 의해서만 변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또한, 그는 인간소외의 가장 근본적인 원인인<경제구조>를 변경시키는 객관적인 실행에 의해서만 인간의 소외상태를 극복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다시 말하면, 마르크스는 종교개혁이 경제개혁을 가져오는 것이 아니라 경제개혁이 종교개혁을 가져올 수 있다고 믿었다.

 

많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이러한 마르크스의 철두철미한 무신론을 받아들이고 지배층의 이익을 위해 이용되고 있는 <거짓의식>으로서의 기독교를 비롯한 기성 종교들을 거부해 왔다.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와의 대화

 

 

위에 지적한 철두철미한 무신론자들인 마르크스주의자들뿐 아니라 신을 믿는 유신론주의자들인 기독교인들도 모두 앞에서 언급한 세계사적인 위기에 봉착하여 긴급한 문제들을 해결하는데 큰 관심을 두고 함께 대화를 시도해 왔다. 종래에는 주로 이념적 수준에서 기독교사상과 마르크스주의 사상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비교 연구를 하는 가운데 공통점을 찾아 그것을 강조하여 상호 협조관계를 모색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본질에서 기독교는 <유신론>, 즉 <관념론>인데 반해, 마르크스주의는 <무신론>, 즉 <유물론>이다. 이 둘은 사상적으로 영원히 대립관계를 이루고 있다. 심지어 진보적인 정치신학인 해방신학마저도 그 철학적 본질에서 관념론을 탈피하지 못하고 있다. 역사관에서도 기독교의 <구속사관>과 마르크스주의의 <유물사관>과는 평행선을 긋고 있다. 따라서 인류의 미래를 염려하는 사회주의자들과 상당수의 기독교인들은 서로의 사상체계와 사관에서 공통점을 찾기보다는 양측이 공유하고 있는 <인간적 가치들>에서 협조관계를 찾고 있다. 다시 말하면, 기독교인이나 사회주의자나 모두 어떤 주의자 이전에 하나의 인간이며 양쪽이 다 위에 지적한 인류멸망의 위기에 처해 있다는 점이다. 기독교인들이라고 해서 초월적으로 딴 세상에 사는 것이 아니라 이 세상에 살고 있다. 죽은 후에 천당에 가느냐 못 가느냐 하는 문제는 이차적 문제이고 지금 인류가 직면한 핵무기, 수소폭탄의 파괴력, 환경오염, 인종차별, 파시즘의 억압, 착취, 대량학살, 등의 여러 사회 문제들을 극복하고 인류의 평화, 평등, 자유, 인권, 자비, 민주주의 같은 인간의 이상(ideal)을 달성하려는 것은 기독교인들이나 사회주의자들의 공통의 꿈이라는 것이다. 위에 언급한 긴급한 사회문제들을 효과적으로 해결하기 위하여 기독교인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어떤 도움을 줄 수 있겠느냐는 관점에서 각자의 철학적 입장을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긴급한 사회적 문제들을 풀어야겠다는 마음 자세만 갖고 있으면 양측이 적대할 이유가 없다는 것이다.

 

사실상 모든 종교가 다 일정한 도그마, 신조, 상징들을 갖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들은 계속 변화됐음을 역사는 지적하고 있다. 그것은 어떤 종교가 그 도그마와 신조를 포기해서가 아니라 구체적인 사회역사적 생활 속에서 환경의 변화에 따라 그 도그마와 신조의 의미를 재해석하고 재적용하는 가운데 변화되어온 것이다.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도그마인 <죄>에 대해서 예를 들어보자. 기독교에서 인간은 누구나 다 죄가 있으므로 구원받기 위해서는 이 죄와 싸워 이겨야 한다고 가르친다. 보수주의 신학자들은 인간의 죄란 <원죄>로서 인간은 누구나 유전적으로 죄를 가지고 태어나기 때문에 저 스스로 죄를 극복할 수 없고 오로지 제2의 아담인 신의 아들 예수에 의지하여 극복될 수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까 죄를 극복하기 위해서는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죄 사함을 받는 길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상당수의 유럽이나 미국의 자유주의 신학자들은 <죄>를 <사회적 부정의>라고 정의내리고 그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사회정치적 변혁에 참여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1960년대의 미국의 마틴 루터 킹 목사는 <인종차별>을 죄로 보고 그것을 철폐하기 위해 무저항 투쟁을 하다 살해되었다. 1960년대 남미에서는 콜롬비아의 신부 카밀로 토레스를 비롯한 무수한 가톨릭 신부와 신도들이 <제국주의와 군사파쇼독재의 식민통치>를 죄로 보고 그 해결을 위해 무장투쟁까지 하다 희생되었다. 특히 니카라과 혁명에는 기독교인들이 대거 참여하여 미 제국주의와 그 대리 정권인 소모사 정권을 타도하였다. 지금 제국주의의 본산지인 미국에서마저 <죄>를 <군국주의>로 보고 많은 기독교인들이 반전 반핵운동에 나서고 있다. 앞 장에서 이미 기독교의 핵심 교리인 <그리스도론>이 어떻게 <상향식 그리스도론>으로부터 <하향식 그리스도론>으로 변천되었는지 이미 설명했기에 여기서는 생략한다. 이와 같은 예들에서 잘 드러나듯 기독교의 도그마와 교리도 변화되고 재해석됐음을 볼 수 있다.

 

그러니까 중요한 것은 유신론이냐 무신론이냐가 아니며, 자기가 믿고 있는 신조를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가 아니라, 긴급한 사회문제를 해결하는데 어떤 태도를 보이느냐이다. 만약 유신론자인 기독교인이 반전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여 투쟁하고 있다면 그 운동에 나선 무신론자인 사회주의자와 대립할 이유가 없는 것이다. 단지 그들이 토론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신의 존재 여부>가 아니라 어떻게 효과적으로 전쟁반대운동을 전개할 수 있느냐 하는 합리적인 방법론을 공동으로 탐구하는 일이다. 여러 진보적인 기독교인들은 핵무기를 비롯한 여러 살상무기를 계속 생산하게끔 하는 제국주의와 자본주의를 분석하는데 심지어 마르크스주의적 분석방법을 기꺼이 수용하고 있다. 남미의 각처에서 해방신학자들은 <사회악>을 분석하는데 역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방법을 받아들이고 있다. 그것은 이 방법이 아주 과학적이고 합리적이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서 그들이 기독교 신앙을 버린 것은 아니다. 이와 같이 위에 말한 인간적인 보편적 가치들을 위하여 기독자들과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함께 서로 대화하고 서로 협력하며 공동투쟁을 전개하는 것이 현시대의 추세이다.

 

 

주체사상과 기독교

 

 

이북의 종교관은 지난 시기 많은 변화과정을 겪어왔다. 특히 해방 후 기독교가 이북의 사회주의 정권에 정면으로 도전적인 활동을 일삼자(신의주사건 등), 이북은 기독교를 비롯한 모든 종교활동을 부정적인 측면에서 보아왔다. 이북의 사회과학원에서 펴낸 [정치 용어 사전]의 종교란에 보면 “종교란 인간의식에 현실이 환상적으로 왜곡되어 반영된 것이다. 종교는 세계를 왜곡되게 반영한 것으로서 과학과 양립할 수 없다. 종교는 역사적으로 지배계급의 수중에 장악되어 인민을 기만하며 착취 억압하는 도구로 이용되었으며, 또 근대에 들어와서는 제국주의자들이 후진국의 인민을 침략하는 사상적 도구로 이용되었다.”고 정의하고 있다. 이 사전은 계속하여 “기독교는 중세기부터 봉건적 착취와 위계제도를 신성화하는 수단이었으며 온갖 선진사상과 과학의 흉악한 원수였다.”고 쓰고 있다. 물론 기독교를 비롯한 종교가 위에 지적한 부정적 역할을 해온 면도 있다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위에서 지적했듯이 종교의 사상도 역할도 시대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다.

 

1980년 내가 일본에서 개최된 [민족통일 심포지엄]에 참석했을 때의 일이다. 내가 묵고 있는 호텔로 <조선문제연구소>의 한 젊은 연구원이 나를 찾아왔다. 그의 질문은 지금까지 학교에서(일본의 조선대학교 출신) <종교는 아편>이라고 배웠는데 어떻게 이남에서 많은 기독교인들이 사회변혁운동에 그렇게 용감하게 참여할 수 있느냐는 것이었다. 나는 길게 성서에 나오는 <출애굽기 사건>으로부터 시작하여 해방신학의 요점을 설명해주면서 민중신학과 해방신학의 관점에 서면 기독교인들도 사회변혁운동에 참여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여 설명해주었다.

 

사실상 <반공 반북>과 <정교의 분리>라는 깊은 잠에서 깨어나 이남 기독교는 1970년대에 이르러 민주주의와 인권, 인간의 존엄성이라는 인간 일반의 가치들을 지키려는 사회정치운동에 참여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1972년 유신공포정치가 시행되었을 때 많은 기독교 신도들은 유신정권과 충돌하여 감옥에 가게 되었다. 1973년 4월 남산 부활절예배 사건으로 박형규 목사, 등 한국기독교총연맹 학생들(KSCF)이 대거 검거되었다. 그리고 민청학련 사건 때 KSCF의 김관석 목사를 비롯한 관계자 4명이 도시선교와 빈민선교에 독일교회가 제공하는 원조기금을 유용해 썼다는 죄목으로 감옥에 감금되었다. 뒤이어 일어난 신학교 교수 12명의 해직사건, 1976년 3월 1일, 안병무 교수, 문익환 목사, 등 기독교인사들에 의한 국가전복 선동 내란음모사건, 여러 산업선교회원에 의한 노동쟁의와 투옥사건, 등의 사건들은 1970년대에 들어와 기독교 진리의 본질인 민중사랑, 자유, 평등, 인간의 존엄성을 이남 사회에 구현하기 위하여 군사독재와 충돌했던 산 체험적 사건들이었다.

 

특히 1980년대에 들어와 광주 의거를 체험한 이남기독교는 미 제국주의의 본질을 이해하고 나서 적극적으로 반외세 자주화 운동, 그리고 통일운동에 참여하였다. 그 대표적 예가 문부식을 비롯한 고려신학교 학생들의 <부산 미 문화원 방화사건>이었다.

 

1980년 후반에 이르러 기독교운동은 노동자, 농민, 등 기층 민중의 사회운동에 동참함으로써 진보화되었으며, 그 결실로 문익환 목사, 문규현 신부, 등과 여러 해외의 기독자들이 이북을 방문함으로 통일운동의 제일선에 나서게 되었다. 이 활동과정을 세밀하게 관찰한 이북은 1988년 1월에 발간된 고림 선생의 [주체철학 입문]에서 다음과 같이 종교관을 묘사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은 종교를 단순히 민중의 ‘아편’이라는 굳어진 전통관념으로만 대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또한, 곧이어 그는 “자주, 민주, 통일운동에 일떠선 양심적인 기독교인들의 신앙적 기초로 된 현대신학을 단순히 ‘민중의 아편’으로 치부해버리고 부정해버리는 것은 한국의 현실을 외면하고 종교에 대한 낡은 고정관념에 포로된 사람들일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민중을 각성시키고 자주, 민주, 통일을 위한 애국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양심적인 종교인들의 역할을 올바르게 평가하고 그들과의 연대를 더욱 강화하고 확산시켜나가야 할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역시 현대의 민중신학을 비롯한 정치신학은 <신학으로서의 세계관적 한계성>을 가지지 않을 수 없다고 고림 선생은 지적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그러한 세계관적 한계점은 구체적인 인간 가치들을 실현하는 방향과 변혁방법을 설정하는데 지 대한 영향을 주기 때문에 그 한계점을 지적해보자.

 

그 한계점을 이남의 민중신학을 창시한 진보적 신학자 중의 한 분인 안병무 교수에게서 찾아보자. 그는 자기 책 [역사 앞에 민중과 더불어]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공산주의는 인간의 머리로 짜낸 설계도이다. 이에 대하여 공관서에는 하느님의 주권을 전제로 한다… 그러한 하느님을 믿고 안 믿는 결과의 차이는 어마어마하다.” (p.312)

 

그는 곧이어 “구원의 주체는 하느님이며”(p. 324), “성서는 언제나 문제의 근거를 하느님과의 관계에서 본다. 하느님과의 관계의 단절이 인간비극의 원인이다.” (p. 325)라고 주장하고 있다. 결국, 민중신학도 사상적 측면에서 보면 형이상학적인 관념론의 틀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리고 민중신학의 사회주의에 대한 이해가 너무 천박하다.

 

그 한계성을 극복해주는 철학이 바로 주체철학이라고 고림 선생은 지적하고 있다. 지난 시기 기독교를 비롯하여 많은 철학적 사조들이 <물질과 의식과의 상호관계의 원리>에 기초하여 물질 또는 정신(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을 중심에 놓고 세계를 고찰하는 철학적 방법에 따라 세계관을 세웠다. 그러다가 마르크스주의의 <변증법적 유물론>이 등장하여 <형이상학적 관념론>을 극복하고 세계의 <물질적 본성>과 그 <운동발전의 합법칙성>을 해명함으로써 물질과 의식과의 관계문제를 둘러싼 철학의 장구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 그 기초 위에서 세계에서 가장 발전된 물질적 존재인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밝혀내어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해명함으로써 인간을 세계의 주인, 세계의 지배자, 개조자로 내세우는 것이 주체철학의 요지이다.

 

마르크스주의는 <세계의 물질성>과 그 <합법칙적 운동법칙>을 발견하고 그것을 사회역사 연구에 적용하여 <유물사관>을 정립함으로써 <인간의 본질적 특성>과 세계에서 차지하는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밝힌 주체사상이 나올 수 있는 전제를 마련하는데 큰 공적을 세웠다. 인간의 <본질적 특성>을 밝히고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을 <철학의 근본문제>로 정립한 것은 새로운 혁신이며 완성이라고 고림선생은 위의 책에서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주체철학의 근본 입장은 기독교의 철학과 큰 대조를 이룬다. 고림 선생은 다음과 같이 그 차이를 지적하고 있다.

 

“인간 외에… 인간의 운명을 규정한다는 그 어떤 신비한 존재나 초자연적 힘이란 현실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실제로 존재하는 세계는 인간에 의하여 지배되고 개조되는 물질세계일 뿐이다. 인간의 운명을 규정한다고 하는 신이란 인간이 현실생활을 환상적으로 표현한 인간의 창조물일 뿐이다. 즉 인간이 신의 피조물이 아니라 신이 인간의 환상적 창조물인 것이다.” (p. 67)

 

따라서 주체사상은 인간이 자기 운명을 그 무엇에도 의탁하지 않고 인간 스스로가 자기 운명을 책임지고 개척할 수밖에 없다고 믿고 있다.

 

이러한 철학의 기본 입장은 또한 <사회변혁론>에서도 큰 차이를 보인다. 이남의 민중신학의 변혁론의 입장을 다시 안병무 교수에게서 찾아보자. 그는 위의 책 326페이지에서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공산주의는 바로 폭력에 의해 쟁취한 권력이기 때문에 절대화되었으며 폭력으로 얻은 것은 계속 폭력으로 지킬 수밖에 없다. 그리스도교는 칼을 쓴 자는 칼로 망한다는 말씀을 좌우명으로 한다…. 기독교인은 끝끝내 평화적 방법을 모색하면서 수난을 각오하는 것이 그리스도교의 본 모습이다. 그러기 때문에 ‘나라가 임하소서’라는 기도에 귀착된다. 기도는 궁극적인 힘을 믿는 신앙 행위이다.”

 

이들 기독교 사회변혁론자들은 결국 그 방법을 성서에서 찾으며, 그들의 신 하느님을 믿는 신앙에 의존하고 있다. 결국, 하느님만이 인간을 포함한 크고 작은 모든 세계의 물질들을 창조하고 운영하며 사회생활 전반도 개혁한다고 믿고 있다. 인간은 단지 그 하느님의 개혁사업에 능동적으로 참여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결국 기독교에서 사회변혁의 주체는 신이다. 그리고 이들 기독교변혁론자는 폭력에 대한 이해도 너무 피상적이다. 인간의 자주성을 짓밟는 제국주의자들의 폭력과 자주성을 지키기 위한 사회주의자들의 정의의 폭력을 구분하지 못하고 있다.

 

한편, 마르크스주의의 변혁이론에서는 하느님이 아니라 <물질>이 일차적이며 사회발전에서 객관적 물질적 여건인 <생산양식>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귀결로부터 <물질 경제적 요인>에 일차적이며 결정적인 의의를 부여하고 있다. 그리하여 역사의 기초에 <생산양식>이 놓여있고, 사회변혁의 근본 추동력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관계>라고 보고, 사회변혁승리의 중요한 객관적인 물직적 조건을 갖추기 위해 <생산력>의 발전에 힘써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민중이 변혁운동에 목숨까지 내놓고 참여하는 것은 생산력을 발전시켜 물질적 요인을 마련하기 위한 것이 아니란 점이다. 물론 물질적 요인은 변혁운동의 객관적 환경과 여건, 수단으로서 그 준비 정도, 성숙 정도는 그 발전과 성과적 수행에 큰 영향을 미친다는 것은 사실이다. 문제는 그것이 사회변혁운동의 발생발전을 규정하는 결정적 요인, 그 승패를 결정하는 요인으로 될 수 있느냐는 점이다.

 

사회를 사람들의 자주적이고 창조적인 유기적 결합체라고 본다면, 사회적 운동의 본질은 <인간의 운동>이며, 따라서 사회변혁운동은 <민중의 목적 의식적인 운동>이다. 인간을 객관적 물질적 존재임과 동시에 주체적 성격, 즉 자주적, 창조적,의식적 성격을 띠고 있는 존재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주체사상의 관점이다. 따라서 사회변혁운동은 민중이 그것을 사활적 요구로 들고 나오고, 또 그것을 수행할 각오를 해야 한다는 것이다. 유리한 물질적인 객관적 여건이 조성되고 유리한 모든 환경이 다 갖추어졌다 하더라도 민중이 그것을 요구하지 않고 각오가 되어 있지 않으면, 즉 <혁명역량>이 준비되어 있지 않으면 사회변혁운동은 발생발전할 수 없다는 것이다. 사회변혁운동을 반대하는 지배층들은 그 유리한 물질적 조건을 부숴버리기 위한 최신식 장비들, 언론매체들, 폭력기구들, 사상기구들을 다 갖추고 있을 뿐 아니라 국제적인 지원까지 받고 있다.

 

그러기 때문에 사회변혁운동이 성공하기 위해서는 <생산력의 발전>도 물론 중요하지만, 인간을 자주적, 창조적, 의식적인 사회적 존재로 발전시키기 위하여 인간의 사회정치적 속성을 더욱 높은 수준으로 끌어올려야 한다. 즉 자연개조도 중요하지만 인간 자체와 사람들의 관계도 개조해야 한다는 말이다. 따라서 <생산력>을 높여 물질적 조건을 성숙시킴과 동시에 자주적, 창조적, 의식적 존재인 인간 자신을 재생산해내어야 한다. 즉 <변혁운동가들>을 계속 재생산해 내어 <혁명역량>을 키워야 한다는 것이다.

 

사회변혁의 주인이며 직접 담당자인 민중의 본질적 속성을 발전시키지 않고는 자본주의 제도를 제거하고 사회주의 제도를 세우는 것만으로는 혁명이 성공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 주체사상의 견해이다. 사회변혁을 이끄는 일꾼들을 사상적으로 문화적으로 개조하지 못하면 새로운 사회주의 제도 속에서도 관료주의가 나오고, 무능한 기생주의와 의존성이 생겨나며, 주어진 조건에 적응이나 하는 적당주의가 생겨난다고 주체사상은 분석하고 있다. 심지어 어떤 사회주의 일꾼들은 자기 이익이나 추구하며 집단주의를 파괴하는 개인주의에 빠지기도 한다. 나는 덴마크와 스웨덴, 노르웨이, 등 사회민주주의 제도를 채택한 나라들을 방문하여 텔레비전을 볼 때마다 지극히 실망하곤 했다. 그들 나라가 생산력은 발전시켜 경제적으로 부유한 생활을 하고 있으나 사상개조와 문화개조를 통한 인간개조에는 실패했다고 보았다. 그곳의 젊은이들이 미국에서 나온 갱영화에 정신이 빠져있고 상당수가 마약에 빠진 것을 보았다. 주체사상에서는 일찍이 변혁운동에서 이 <인간적 요인>을 중시하고 사상, 기술, 문화혁명을 강조해 왔다. 그리하여 이북에서는 사회주의제도가 확립된 후에도 낡은 사상문화로부터 해방하기 위한 투쟁을 계속 전개해 왔다. 이러한 면을 보지 못하고 오로지 물질적인 발전만 보고 어떤 제도의 발전을 논하는 것은 잘못된 것이다.

 

최근에 많은 해외동포가 이북을 방문하고 돌아와서는 대다수가 “북한은 너무 못산다. 좀 잘살게  해 놓고야 이야기가 되겠다. 남한보다 너무 못산다.”고 한마디씩 한다. 마치 경제적 부를 이루자는 것만이 사회주의인 양 주장하는 학자들도 있다. 그러나 그들은 이북 동포들의 사상의식, 그들의 인간관계의 평등성, 그들의 문화적 수준, 서로 상부상조하는 마음, 변혁과 통일에의 헌신적 자세, 인간애와 조국애, 그리고 무엇보다도 민족의 자주성을 지키는 일, 등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있다. 그리고 남한보다 잘 산다고 하는데 누구의 입장에서 잘 산다는 기준이 없다. 사실상 <생산력> 중심으로 사회제도의 우수성을 평가하는 것은 단지 초보적 단계이다. 이 문제에 대해 이북에서 발행되는 통일신보에서 안광즙 선생은 다음과 같이 잘 지적하고 있다.

 

“사회주의는 민중에 인간의 본성적 요구에 맞는 가치 있는 삶을 보장하며 그들이 서로 돕고 이끄는 단합된 관계를 발전시켜 나갈 수 있는가에 의하여 결정된다. 자본가 계급 위주의 자본주의 사회는 아무리 생산력이 발전하고 물질적 재부가 늘어난다 하더라도 그것이 사람들에게 인간다운 생활을 보장할 수 없고 따라서 공동의 이상을 위해 서로 협력하는 인간관계를 발전시킬 수 없다.”

 

결국, 사회변혁운동의 유일한 방법은 사회변혁운동의 주체인 민중의 사상의식을 개조하고, 그들을 조직화하여 그들의 창의력과 창발성을 최대한으로 발양시키는 것, 즉 <혁명역량>을 키우는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기독교와 마르크스주의, 그리고 주체사상과의 대화의 핵심적 요인은 <보편적 인간의 가치들>, 즉 민주주의, 평화, 자유, 평등, 인간 존엄, 사회정의, 등을 신장 발전시키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이나 마르크스주의자들이나 주체사상 신봉자들이나 모두 인간이고 이 세상에 사는 이상 누구나 공통으로 위에 지적한 인간적 가치들을 존중하고, 그 실현을 위해 노력하고 있다. <종교심>을 단지 자기 종파, 교파의 신조나 도그마나 교리, 예배형태를 신봉하는 것으로 정의하던 독단의 시대는 지나갔다. 독일 여류작가인 루이제 린저는 북을 여러 차례 방문하고 나서 이북 민중들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당신들, 무신론적인 북한사람들은 기독교 방식대로 살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사랑의 생활을 하고 있으며 그것을 사회주의 혁명이라 부릅니다…. 당신들은 돈과 돈의 가치를 생각하지 않으며 남을 위하는 마음으로 살고 있고 삶에 대한 믿음을 갖고 있습니다. 당신들은 공익을 사익의 위에 두며 어떤 노동자도 억압하지 않고 어린이와 부녀자를 학대하지 않습니다…. 당신들은 다른 사람들이 필요로 할 때 기꺼이 자신을 내맡깁니다.” ([또 하나의 조국], 1988년 p. 182-183)

 

그래서 이북으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주했으며 신은 기독교인의 배신 때문에 무신론자의 곁에 있다”고 루이제 린저 여사는 결론 내리고 있다.

 

이러한 실제적인 <생활경험의 질> 속에서 보면 주체사상과 기독교는 많은 공통점을 갖고 있다. 그러면 통일신학을 세우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기독교와 주체사상이 어떤 공통점과 차이점이 있는지 알아보자.

 

 

기독교와 주체사상과의 공통점과 차이점

 

 

기독교와 주체사상의 공통 이상은 인간의 자주, 해방, 정의, 평화, 존엄이 그 골자로 되어 있다. 기독교 핵심사상을 한마디로 말하라면 <사랑>이다. 모든 계명의 핵심은 “네 이웃을 네 몸같이 사랑하라”에 요약되어 있다. 주체사상에서도 <사랑>을 강조하고 있다. 사랑이란 주체사상에 의하면 <사회적 인간의 본성적 감정으로 사회적 집단에 고유한 생리>라는 것이다. 따라서 이 인간 상호 간의 사랑은 인간집단형성의 기초로 되며, 운명공동체를 이루는 인간들의 사회적 결합의 기초라는 것이다. 사회적 인간은 사회적 집단의 운명과 자신의 운명을 결합하고 집단을 위한 활동에서 참사랑의 감정을 표출하며 실현한다고 주체사상은 보고 있다. 그러기에 인간의 생명인 <자주성>을 존중하고 적극적으로 발양시키며 <자주적 본성>에 맞게 살도록 집단으로 이끌어주는 사랑이 인간에 대한 참사랑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사랑은 인간의 자주성을 꽃피워 행복의 정상에 올려세우는 온갖 열정과 활동의 원천, 삶의 온기이며 자양이라는 것이다. 오늘날과 같이 제국주의에 의해 민족적 자주성이 파괴되고 분단과 독재가 강요되는 마당에 민족의 자주성과 통일, 민주를 위해 투쟁하는 한길에서 생사고락을 같이하는 동지적 관계를 맺는 원동력이 바로 사랑 즉, <혁명적 동지애와 의리>라는 것이다. 또한, 수령, 당, 군대, 대중이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맺어주는 원동력 역시 <혁명적 의리와 동지애>라는 것이다. 우리는 많은 기독교인들이 동료 교인들을 위해 여러 형태로 사랑을 바치는 것을 본다. 단지 그것이 주체사상의 사랑과 차이가 있다면 <사회정치적 성격>이 결여되어 있다는 점일 것이다.

 

 

그리스도론과 수령론

 

 

기독교에는 <그리스도론>이 있듯이 주체사상에는 <수령론>이 있다. 기독교의 여러 종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지만,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는 나사렛 예수가 인류를 죄악에서 건져줄 메시아라고 믿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예수를 역사적 인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아들인 초자연적 존재로서 지금도 하나님 우편에 앉아서 인류를 다스리는 머리가 되고 있다고 보고 있다. 기독교에서는 모든 예배, 기도, 신조, 도그마, 등 모든 내용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설명되고 있다. 사실상 기독교의 모든 활동의 중심은 그리스도이고 전 세계 기독교인들을 하나로 묶어주는 구심점도 그리스도이다.

 

한편,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수령>이란 역사의 주체인 민중의 <최고 뇌수>, 민중결집의 <구심점>, 민중의 조직적 의사의 체현자, 민중의 <최고 대표자>를 말한다. 이 민중의 수령은 어떤 탁월한 개인이 아니며 민중과 수령과의 관계는 전체와 부분의 관계로 된다. 민중은 역사의 주체이지만 수령, 당, 군대, 대중의 통일체라는 내적 구조를 갖추지 못 헸을 때에는 역사의 자주적 주체로 되지 못하므로 자기의 사명과 역할을 다할 수 없다고 주체사상은 보고 있다. 사상적으로, 그리고 조직적으로 민중이 수령과 당을 중심으로 결속될 때에만 역사와 자기 운명을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나갈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수령은 바로 민중을 사상적으로 결속시키고 조직적으로 결집하는 <구심점>이다. 즉 수령, 당, 군대, 그리고 대중은 운명의 공동체로서 역사의 자주적 주체가 된다고 주체사상은 지적하고 있다. 마치 기독교의 구교에서 그리스도, 주교단, 평교인, 그리고 신교에서 그리스도, 당회, 평교인이 하나의 유기적 공동체로서 구원의 주체를 이루는 것과 형식적으로는 같다고 보겠다. 만약에 기독교인들이 아무리 기독교신앙에 몰두한다고 해도 개인으로 뿔뿔이 헤어져서는 신앙생활을 계속 유지할 수 없을 것이다. 교인들이 목사와 장로, 혹 신부와 평신도대표로 뭉칠 때만이 신앙의 공동체를 이룰 수 있다. 여기서 그리스도는 교인들을 묶는 머리, 구심점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에 의하면 기독교의 그리스도론은 환상적이며 비과학적인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주체사상에서 말하는 수령은 <우상숭배>일 수가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민중은 오직 자기 자신의 사상 의지에 의해서 자기의 힘에 의거해 역사를 개척해나가기 때문에 그들의 최고 뇌수인 수령의 사상은 민중 자신의 조직적 의사이며, 민중 전체의 요구와 이익을 대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민중의 사상이 바로 수령의 사상이 되므로 민중이 수령의 사상에 의하여 활동하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의 사상 의지에 기초해서 활동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이북의 주체사상가들은 소련과 동구의 사회주의 나라들이 붕괴한 것은 여러 원인이 있지만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원인은 바로 위에 언급한 <수령관>이 뚜렷하게 서 있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마르크스주의는 역사를 <영웅사>로 풀이하던 종래의 사관을 바꾸어 <민중사>로 대치하는 데 성공함으로써 사상사에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개인적 영웅이 아니라 민중이 역사의 창조자라는 마르크스주의적 이해는 역사발전과정을 <자연사적 과정>으로 보는 이론적 틀 안에서 정립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은 앞에서 이미 지적한 대로 마르크스주의가 역사의 기초에 <생산양식>이 놓여 있고 역사의 원동력이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 때문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마르크스주의적 역사이해는 역사과정을 노동자를 비롯한 근로민중이 자기의 자주적 요구와 지향에 맞게 사회를 변혁해나가는 과정으로, 민중을 역사의 주체로 보는 주체사상의 이해정도에까지 도달하지 못했다고 주체사상가들은 진단하고 있다. 따라서 마르크스주의에서는 개인의 역할과 민중의 역할을 엄격히 분리하고 민중이 결정적 역할을 한다는 것을 강조하였으나 개인과 <민중의 수령>을 구분하지 못하고 동일시한 데로부터 민중의 역할과 수령의 역할을 분리하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주체사상에서는 개인과 수령이 엄격히 구분되고 수령이 역사의 주체인 민중의 한 부분, 그것도 <핵심적 부분>이라고 강조되고 있다. 수령은 민중에 사상과 전략 전술을 주고 단결을 이룩하게 하여 참다운 역사의 주체, 자주적인 주체로 되게 하는 역할을 하는 뇌수, 중심이라는 것이다.

 

 

영생론

 

 

아마 기독교에서 가장 중요한 사상이 그리스도론 다음으로 <영생론> 혹 <부활론>일 것이다. 그리스도가 초자연적 존재로서 죽지 않고 부활하여 하늘나라에서 영원히 기독자들의 머리로 살아 있듯이, 기독교인들도 죽어서 부활하여 그리스도가 다스리는 천국에서 영생한다고 믿고 있다. 인간의 죽음에 대한 공포로부터 해방해주고 인간의 한계적 삶을 영원으로까지 인도해주는 이 <영생론>이야말로 교회로 사람들을 이끄는 힘이다. 이 영생을 얻기 위하여 많은 기독교인들이 자신의 재산과 재능, 심지어 목숨까지 바치는 경우가 허다하다. 이것은 인간의 실존적 삶 자체의 불안과 불확실성, 그리고 한계상황에 대한 공포심으로 비롯된 결과라고 보겠다.

 

그러나 주체사상에서는 기독교에서 주장하는 것처럼 영생하는 삶이 죽음에 대한 초월적 입장, 즉 기독교의 신앙에 귀화하는 데서 주어진다고 보는 신비적 입장을 부정하고 <사회정치적 생명>을 <육체적 생명>보다 중시하는 태도를 실천하는 데서 구현된다고 믿고 있다. 민족, 민중의 자주성을 위해 일신의 안락도, 부귀도, 영화도, 가정도, 심지어 육체적 생명마저 혼연히 버린, 태백산 빨치산들의 영생에 대하여 조정래 작가는 주인공 중의 하나인 손승호의 말을 빌려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이 세상에 그 누구의 목숨이 죽음으로 이어져 있지 않은 목숨이 있는가. 그러나 이 보편적 명제 앞에서 두려움이 없는 건 죽음을 종교적으로 초월해서가 아니었다. 구체적인 자각으로 죽음을 끌어안았기 때문이었다. 죽음이 추상적일 때 두려움은 생기고, 현실의 안위에 집착할 때 그것은 증폭되는 것이다. 자각한 자의 죽음은 그것 자체가 행동이었다.”

 

왜 많은 기독교인들이 영원한 하늘나라를 확고히 믿으면서도 죽음 앞에서 공포에 떨고 죽기를 거부하고 악착같이 살려고 발버둥 치는가. 그들의 죽음이 추상적이고 천당이 추상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사회정치적으로 자각한 자들은 생명의 모체인 <사회정치적 집단> 속에서 살고 죽기 때문에 그들의 <사회정치적 생명>은 영원한 생명력을 가진 민중의 사회정치적 집단과 결부되어 그와 함께 영생하는 것이다. 이것은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영생이다. 그러기에 집단을 위해 개인은 때때로 기꺼이 생명을 바치기도 하는 것이다. 일제 강점기 때 얼마나 많은 독립운동가가 조국의 해방을 위하여 기꺼이 목숨을 바쳤는가!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생명을 지니고 빛내어나갈 수 있게 하는 사회정치적 생명활동의 원천이며 품인 <사회정치적 집단>은 개인들로 하여금 집단의 자주성과 창조성을 강화하는데 이바지하도록 사상적으로, 조직적으로, 그리고 혁명적 동지애와 의리로 이끌어줌으로 개인들의 업적이 집단의 생명에 체현되어 그 집단과 함께 영원히 살게 되는 것이다. 최제우, 안중근, 김구, 여운형, 4.19와 5.18의 영령들, 전태일, 박종철, 이철규, 등 무수한 애국자들은 우리 민족과 영원히 영생하는 것이다. 그러기에 조정래 작가는 다음과 같이 결론내리고 있다.

 

“자각하지 못한 자에게 역사는 존재하지 않으며, 자각을 피하는 자에게 역사는 과거일 뿐이며, 자각한 자에게 비로소 역사는 시간의 단위 구분이 필요 없는 생명체이다. 올바른 쪽에 서고자 한 무수한 사람들의 목숨으로 엮어진 생명체, 뚜렷한 실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역사는 흘러가는 것이 아니라 크는 것이다.”

 

무수한 변혁동지들과 애국자들의 힘과 의지로 역사는 크는 것이다. 즉 우리 민족과 민중의 자주성과 창조성이 커가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들의 뜻은 계속 이어지고 끊임없이 이어지어 마침내 민족의 자주, 민주, 통일이 달성되고야 말 것이다. 이것이 주체사상의 영생론이다.

 

예수를 구세주로 믿고 그가 주는 영원한 생을 받아안은 기독교인들은 신앙의 열정으로 불타 모이기를 힘쓰며 봉사하고 전도하는데 열광적이다. 기독교인들처럼 열심히 모이는 단체는 아마 별로 없을 것이다. 일요일 새벽기도회, 낮 예배, 저녁 예배, 수요일 밤 예배, 금요일 가정 예배, 등 일 주일에도 기본적으로 다섯 번은 만난다. 매일 새벽기도에 참석하는 교인들도 많다. 이렇게 모이는 열성 때문에 교회가 유지되고 결국 많은 사람이 기독교 신앙에 빠지게 된다. 그리고 기독교인들은 교인들이 병들고, 결혼하고, 문제가 발생하면 기꺼이 방문하여 돕는다. 이들은 믿지 않는 사람들을 하나라도 더 개종시키려고 방방곡곡을 누비고 다닌다. 비바람이 부나 눈보라가 치나 가족이나 혹은 정부가 반대하여도 죽음을 내놓고 신앙을 지키는 사람들이 많다. 이러한 신앙의 열성은 사회정치적 요소가 배제된 점만 빼면 참 부러울 정도이다. 나는 가끔 저렇게 잘 조직되고 소명에 불타는 신앙의 열정을 하나도 낭비하지 않고 사회변혁의 에너지로 바꿀 수는 없을까 곰곰이 생각해보곤 한다. 사실상 머리로만 자유주의적이고 급진적인 많은 종교인과 형식주의적인 진보주의자들이 말은 많이 하는데 그들이 전혀 사회변혁에 대한 실천적 신념이나 열성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을 보고 실망하곤 했다.

 

주체사상에서는 <신념>과 <의지>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주체사상에서 강조하는 신념과 의지는 위에 말한 기독교의 신앙의 열성과 같은 것이 아니다. 신념은 주체사상의 견지에서 보면 생활과 실천을 통해 검증된 사상이론의 당위성에 대한 확신에 바탕을 두어 형성되고 굳어진 마음의 줏대로서 그것은 지식과 사상의 통일체로 이루어져 있다. 이러한 신념은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추동하고 규제한다. 이러한 신념은 <의지>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는 것이다. 강인한 의지는 선천적으로 태어나는 성격이 아니고 진보적 사상이 낳는 정신력, 혁명적 신념이 낳는 정신력이라고 주체사상은 말한다. 민족과 민중의 자주위업을 위해 싸우는 사람들에게는 투철한 신념과 강인한 의지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왜냐하면, 민족과 민중의 자주위업은 안일하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반대하는 제국주의와 그 대리인들과 생사를 판가름하는 험난한 투쟁을 통해서 쟁취해야 하므로 강한 신념과 의지를 갖춰야 한다. 그 강한 신념과 의지를 보장해주는 것이 바로 영생을 담보하는 <사회정치적 집단>인 것이다. 사상적으로 조직화되지 않으면 개인이 아무리 강철같은 신념과 의지를 갖고 있어도 쉽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물론 궁극적으로 용기 있는 결단을 해야 하는 것은 개인이겠지만.

 

 

종말론

 

 

기독교의 교리 중 가장 매혹적인 것이 바로 <종말론>이다. 그것에 의하면 세계는 결국 하나님의 심판을 받게 되는 마지막 때가 오는데 그때 그리스도께서 다시 세상에 내려와 양과 염소, 즉 믿는 자와 믿지 않는 자를 가려내어 심판한다는 것이다. 이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기 위하여 끝까지 신앙의 지조와 절개를 지킬 것을 강조하는 것이 바로 종말론이다. 신앙의 지조와 절개를 지킨 자들에게는 희망찬 영광의 면류관이 기다리는 때이지만 그렇지 못한 자들에게는 멸망의 때인 것이다. 이 <종말론적 소망> 때문에 많은 기독교인들이 시련을 이기고 신앙을 지켜나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종말론에 대한 잘못된 이해를 하고 세상을 부정하고 가정과 사회, 그리고 민족마저 부정하고 오로지 신앙적 절개만을 지키려는 그룹들이 있다. 핵무기나 수소폭탄의 위기에 봉착하여 이제 종말의 때가 왔다고 강조하면서 교회 확장에나 힘쓰는 자들이 있는가 하면 핵무기나 수소폭탄을 써서라도 <적그리스도>인 공산주의자들을 멸망시켜야 한다는 극단적인 보수적 반공기독교인들도 있다.

 

주체사상에서도 종말론적 소망이 강조되고 있다. 결국, 제국주의와 그 추종세력들은 필연코 망하고 민족, 민중의 자주성을 위한 사회주의 위업은 기필코 승리한다는 것이 바로 주체사상의 종말론이다. 김주석은 1990년에 다음과 같이 지적하였다.

 

“인류의 미래는 결코 제국주의에 속할 수 없으며 제국주의가 멸망하고 사회주의가 승리하는 것은 어길 수 없는 역사의 법칙이다.”

 

이처럼 주체사상의 종말론은 항상 현재적이며 동시에 미래적이다. 민족, 민중의 자주성과 사회주의를 위해 몸 바쳐 투쟁하는 삶은 이미 지금 가장 고귀하고 값진 삶을 살고 있으며 동시에 그 투쟁의 삶이 연결되어 마침내 민중의 해방, 민족 해방의 날을 가져온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오늘날 많은 의식화된 사람들이 민족, 민중과 함께 사는 삶을 가장 값진 삶으로 여기고, 민족, 민중의 자주성 실현에 그들의 청춘도, 재능도, 생명도 서슴없이 바치는 것이다.

 

 

결론

 

 

위에서 길게 다룬 바와 같이 기독교와 주체사상은 그 둘이 추구하는 이상이나 그 이상을 추구하고 실현하려는 열정과 신념, 지조, 그리고 그 이상을 실현하는 데 대한 궁극적 소망, 등 서로 많은 공통점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한 동시에 많은 본질적 차이점이 있다. 그런데도 앞의 장에서 이미 지적한 바와 같이 <종교심>을 <경험의 질>로 넓게 해석하게 되면 그 둘이 다 <종교적>이다. 특히 역사의 추동력을 생산력과 생산관계의 모순으로 보는 마르크스주의보다 역사의 원동력을 민중의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으로 보는 주체사상이 더 기독교와 대화하고 협력할 폭이 넓다고 본다. 왜냐하면, 신을 믿든 안 믿든 간에 기독교인이건 아니건 간에 혹은 어떤 종교를 믿든지 안 믿든지 인간은 누구나 종교인이기 이전에 인간이다. 그렇다면 인간으로서 누구나 종교를 믿고 그 종교가 추구하는 이상을 실현해나가자는 것은 결국  주체사상이 내세우는 <세계에서 인간이 차지하는 지위와 역할은 높이자는 것>이다. 주체사상의 핵심적인 사상은 바로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높이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가 단지 신의 존재 여부, 신을 믿느냐 안 믿느냐와 같은 추상적인 개념문제로 주체사상과 대립할 필요가 없다고 본다. 유신론과 무신론이 아무리 싸워봐야 얻어지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오로지 초자연적 신을 믿는 사람이든 믿지 않는 사람이든 인간의 지위와 역할을 높이기 위하여 공동으로 어떤 일을 해볼 수 있으며, 그 공동작업을 어떤 방법으로 더 잘 실천할 수 있을까를 의논하는 것이 더 바람직하고 더 현실적일 것이다.

 

지금 이남은 엄청난 군사비지출로 천문학적인 돈을 낭비하고 있고, 그로 인해 민중의 생활이 궁핍하고, 환경오염으로 많은 사람이 질병에 시달리고 있으며, 빈부의 격차가 심하고, 청년들은 직장을 구하지 못해 거리를 배회하거나 자살을 택하고 있고, 무엇보다 분단으로 인해 가족들이 생이별하여 70년간 흩어져 살아야 하고, 미 제국주의의 신식민지 지배 밑에 민족의 존엄은 짓밟히고, 양키문화로 코리아문화는 사라져 가고 있다. 젊은이들은 <헬 조선>을 외치며 해외로 이민 가고 있다. 도대체 기독교인이라고 해서 위에 지적한 신식민지 하의 분단조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간적, 사회적 긴급한 문제들에서 도피하여 고립적으로 살 수 있단 말인가. 위에 지적한 민족문제인 이남의 외세 지배와 분단을 극복하기 위하여 주체사상을 신봉하는 이북 동포들이 민족의 자주화와 통일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면 그들을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본다. 지금 인류 말살의 핵전쟁의 위기가 코리아반도에 엄습해 있다. 이 위기를 타파하고 민족, 민중의 자주적 지위와 역할을 높이기 위하여 이북 동포들이 수령, 당, 군대, 대중이 하나로 뭉쳐 헌신하고 있다면 그들이야말로 <종교적>이라고 볼 수 있다.

 

지금은 주체사상이 강조하듯이 억압받고 멸시받던 약소민족과 민중들이 세계의 주인으로 등장하여 자기 운명을 스스로 자주적으로, 창조적으로 개척해나가는 자주성의 시대이다. 따라서 역사의 주체인 민중의 지위와 역할을 신장시키기 위하여 기독교도, 마르크스주의도, 주체사상도 협력하여 노력해야 할 것이다. 전 신부였으며 니카라과의 문화부 장관으로 일했던 어니스트 카디넬 신부는 다음과 같이 강조하였다.

 

“나는 사랑의 종으로 사제였다. 그리고 이제 나는 민중의 종으로 그리고 사랑의 종으로 혁명정부의 장관이다. 나는 마르크스주의자이다. 왜냐하면, 마르크스주의가 사회를 과학적으로 연구하고 자본주의 사회로부터 더욱 정의로운 사회로 변화시키는데 하나의 방법을 제공해주기 때문이다. 이 모두는 예수가 선포한 지상에서의 하나님 나라와 관계가 있다. 그 하나님의 나라는 정의의 나라 그리고 계급과 억압이 끝이 나는 것을 포함하고 있다. 미국은 자본주의 나라이고 제국주의 나라로서 돈과 지배와 권력을 추구한다. 그러나 니카라과의 모든 혁명적 활동은 돈, 지배, 권력을 위한 것이 아니라 민중을 위한 것이다.” (Zwerling, [Nicaragua: A New Kind of Revolution] p.46)

 

모든 인간은 어떤 제도 속에 살지만, 그 제도 위에 존재한다. 그것이 설사 기독교 교회라도 인간의 위에 존재할 수 없다. 모든 제도는 인간을 위한 봉사기구일 뿐이다. 무능한 제도는 멸망할 수밖에 없다. 예수는 “인간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게 아니라, 안식일이 인간을 위해서 존재한다. 인간이 안식일의 주인이다.”라고 주장했다. 주체사상은 인간이 <자주성, 창조성, 의식성을 지닌 사회적 존재>로서 세계와 역사의 주인이며 사회변혁운동의 담당자로 자주위업의 종국적 완성을 위한 투쟁을 떠메고 나갈 역량을 지닌 역사의 주체로 규정하고 있다. 따라서 오늘날 미국의 식민지 군사 기지화한 이남의 상황에서 민족을 해방하고 민족분단을 극복하여 조국을 통일하고 독재의 억압에서 민중을 해방하여 민주정권을 세우는 과업에 자주적 인간은 누구나 적극적으로 참여하여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개인의 사회정치적 생명은 우리 민족과 민중의 사회정치적 집단과 결부되어 그와 함께 영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끝)